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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2. 2023

자식에게 글 쓰는 뒷모습을 보여줬을 때 생기는 일

얼마 전 중학생 아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정이 생겨 학군지로 불리는 곳에 전학을 왔거든요. 낯선 환경을 겪은 아이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 눈치였습니다.


"엄마, 가끔 너무 초조한 생각이 들고 이제 나는 겨우 중학생이지만 늦은 걸까 걱정되곤 해. 학교 선생님들도 너희 이렇게 게으름 피우다간 고등학교 가서 공부 잘하기 어렵다고, 이미 늦었다고 막 그러는데 사실 겁나거든. 주변에 친구들이 선행 엄청나게 하는 걸 봐도 초조해지고."


친구들도, 선생님도, 학교 분위기도 예전에 살던 자유로운 신도시와 많이 다른 탓에 아이가 조금 위축되었었나 봐요. 슬그머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데 이어진 이야기는 상당히 희망적이었어요.


"근데 말이야, 세상은 이렇게 겁을 줘도 엄마를 보면 용기가 생길 때가 있어."

"엄마 보면서 용기를 얻는다고? 왜?"

"그렇잖아. 엄마는 나이가 마흔이 훨씬 넘었을 때 새롭게 작가를 하겠다고 나서고.... 고등학생이었던 언니가 엄마 진로는 그만 고민하고 자기 진로 좀 고민해 달라고 할 정도로 엄마는 자기 진로 고민을 많이 했어."

"하하.. 그랬지. 진로 고민은 평생 해도 끝나지 않는 거 같긴 하다."

"응, 근데 그 나이에 엄마가 또 글 써서 작가도 되는 거 보니까, 내 인생은 앞으로 한참 남았는데, 난 그렇게 늦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당연하지, 이제 열 몇 살이 늦긴 뭐가 늦어. 세상이 아무리 겁줘도 초조해할 필요 없어. 조금도 늦지 않았어."

"응, 어쩌면 길은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말이야."


최재천 교수님이 강연에서 말씀하셨지요. 앞으로 우리 아이들 세대는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난 데다가 사회 변화가 커서 한 사람이 일고여덟 번은 직업을 바꾸며 살아가게 될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초중등 12년 공부해서 얻은 '학벌'이란 수단이 인생에서 보장하는 건 제한적일 거라는 거예요. 평균 수명 120세, 학자에 따라서는 150세까지도 보는데 20년 인생으로 나머지 100여 년 인생이 결정될 수 없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러니 아이들한테도 초중등 시기로 네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될 것처럼 너무 겁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출발선에 선 아이에게 저 멀리 까마득한 결승선을 재촉할 게 아니라 바로 앞의 한 발을 내딛는 기쁨을 먼저 알려주는 게 오히려 아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는 것, 우리 알고 있지 않나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뒷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 과정이 저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글을 쓰면서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거든요.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딛는 작가면서 대작을 쓰기 꿈꾸면 당연히 한 줄도 쓰기 어려워집니다. 무슨 대단한 작가가 된 것도 아닌데, 평범한 주부면서 엄마인 제게 그런 걸 해낼 시간적, 공간적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고요. 언젠가 작가 북토크에서 저의 초창기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분이 있었어요.


"주부로서 느끼는 생활의 답답함,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나를 찾아가면서 느껴지는 죄책감이 있어요. 나를 찾아 뭔가를 하면 엄마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고 모성애가 없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엄마의 역할과 나의 일 모두를 잘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가성비를 따지게 됩니다. 체력과 시간도 항상 부족해서 결국 좋은 엄마도, 멋진 여성도 영원히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암담한 마음이 너무 짐작되어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그런 문장이 나와요.


"출산과 육아가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라는 말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출산과 육아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변화시킨다'라는 말이 훨씬 정확하다. 소설가 레이철 커스크는 <생명의 작업>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어머니가 된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결코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나>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이렇듯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운다."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에서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구나.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 논의와 별개로 현재 내가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 안다는 건 언제나 큰 위로가 됩니다. 병도 원인을 모를 때 막막하고 무서운 거지,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걱정되는 한편으로 해결책도 보여서 한시름 놓게 되잖아요.


분열된 상태로 산다면, 거기에 맞춰 적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분열된 상태인 만큼 단번에 큰 성과를 이뤄야 한다고 초조해하지 말고요. 제가 새벽마다 때론 부엌 식탁에 웅크리고, 때론 아이 책상을 빌려서 글을 쓰는 뒷모습을 보여줬을 때 놀랍게도 아이 스스로 인생을 어떻게 살지 답을 찾아나갔어요.

사실 많은 여성들이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글을 써요. 타니아 슐리의 <글 쓰는 공간>에서도 나와요. 이제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작가 중 한 사람인 조앤 K. 롤링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도, 식기와 빵 조각이 어질러진 부엌 식탁에서 글을 썼다고요.


부모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자식들에게 사회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모습을 보여줘야 인생 모범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본질을 잘 꿰뚫어 보는 것 같습니다.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다니지 않더라도, 이렇다 할 사회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저처럼 누군가에게는 조금 궁상맞아 보인다 싶게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끄적거리고 있어도 부모의 그 뒷모습에서 아이는 위안을 얻고 자신감을 채워 갑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많이 바로 잡혔다 해도 여성이 엄마로서, 주부로서, 사회인으로서 모든 것을 두루 잘 해내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희망적이게도 분열적인 자아로 살아갈지언정, 오늘 하루를 충실히 채워가는 내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제 나름대로 배우고 성장합니다. 잔소리나 훈계가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크는 아이들의 생명력. 거꾸로 제가 배우는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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