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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고생들이 교복처럼 입는 검은 롱 패딩. 너도 나도 똑같은 옷을 입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했지만 아이가 너무 원하니 일단 백화점에 가봤다. 내 눈에는 다 그게 그것 같은데 아이는 어떤 상점 앞에 멈춰 예쁘다고 환호했다. 감탄하는 눈길로 보면서도 내 눈치를 본다.
“너무 깔끔하다. 비싸겠지?”
“입어라도 봐. 한번 보자.”
점원에게 건네받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 아이의 표정이 들떠 있다. 앞모습도 보고 고개 돌려 뒷모습도 비춰 보며 마음에 든 표정이다. 그러다 가격을 듣고는 황급히 벗어 놓는다.
“왜? 예쁜데?”
“비싼 것 같아. 그냥 가자.”
“그래도.”
“아냐, 아빠가 안 된다고 할 거야.”
혹시나 싶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격을 들은 남편은 단호했다.
“안 돼. 학생이 무슨 그런 비싼 패딩을 입어? 아웃렛이나 할인하는 데 찾아봐.”
“이 가격 이하로는 패딩이 없는 걸 어떡해.”
“백화점이니까 그렇지, 다른 매장도 더 다녀봐.”
내 표정을 보고 아빠의 반응을 눈치챈 아이가 연신 괜찮다며 엄마 옷을 보러 가자고 한다. 나온 김에 내 옷도 한번 둘러봐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아이 옷을 못 산 게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내 손을 잡아끌며 자기 옷 볼 때보다 더 세심하게 만지고 들춰 보면서 ‘엄마 이건 어때?’ 물었다. 매장에 가서 그래도 비교적 저렴한 윗옷을 골라 입어 보니 아이가 웃으면서 말한다.
“엄마, 윗옷은 예쁜데, 그 낡은 청바지도 좀 다른 걸로 바꿔 입어봐.”
눈치 빠른 점원이 마침 그 옷에 딱 어울리는 바지를 세일하고 있다며 검정 바지를 부랴부랴 들고 온다. 바지까지 같이 갖춰 입으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제법 맵시가 났다. 아이는 호들갑을 떨며 엄지를 치켜든다.
“짱, 짱 예뻐. 우리 엄마 안 같아. 딴 사람 같아.”
두 벌을 사려니까 망설여진다. 더구나 아이 패딩은 못 사면서 내 옷 사기가 미안해진다. 이런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으니 아이가 예쁜데 왜 안 사냐고, 얼른 사라고 성화다.
“너 보기가 미안해서 그렇지, 네 옷은 못 샀는데.”
“엄마, 난 정말 괜찮으니까 제발 사.”
결국 두 벌을 결제하고 나오니 아이가 씩 웃는다.
“우리 엄마 이렇게 갖춰 입으니 예쁘네.”
“그랬어? 평소에 엄마가 좀 신경을 못 쓰고 다녔지?”
“어, 오늘 엄마 보니까 내가 커서 엄마 호강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갑자기?”
“그냥, 엄마도 예쁜 옷 입으니 딴 사람 같은 거 보니까, 내가 예쁜 옷도 많이 사줘야겠다 싶고.”
자기 옷 못 산다고 서운해 하기는커녕 엄마 생각하는 아이를 보니 언제 이만큼 컸나 싶다.
백화점에서 돌아와 생선 가게에 가서 생태를 사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말한다.
“엄마, 생선 가게 주인은 참 낭만적으로 사는 것 같아.”
“낭만적?”
“어, 아늑한 가게에서 사람들이랑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면서 생선 파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여.”
비린내 나는 생선 가게에서 아이가 느낀 감성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직 아이다운 시선과 발상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민첩하게 판단해 버리는 어른들과 달리 어른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아이들. 연예인 대소사가 인생에 뭐가 중요하냐고 질타하는 어른들에게 맞서 연예인을 교실에서 사귀지 못한, 제2의 친구처럼 느끼는 아이들. 때론 자기 욕심은 못 챙겨도 부모 생각하는 어른스러움도 보여서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 아이들. 어른들 눈에 하찮은 순간의 소중함을 잘도 포착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내 아이다. 예전에 한참 인기를 끌던 한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다. 이 세상에는 갑과 을이 있는데 내 자식은 반드시 갑이 되었으면 한다고. 모든 부모의 솔직한 마음이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 아이는 갑이 되는 지름길을 걷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따뜻하고 정 많고 소박하다. 사랑, 배려, 이타심, 과정의 진정성 같은 건 잡동사니 취급해서 빨리 버리고 이기심, 부와 명예, 결과의 성취만을 쟁여놓는 어른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인다.
이 세상 모든 아이가 갑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을로 살지언정 자기 삶에서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아는 사람으로 크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정 많은 을끼리 손에 손잡고 훈훈하게 사는 모습을 그려 본다. 그리 나쁜 그림은 아니다. 자기 자식이 갑이 되어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살기를 바라는 부모만 이 세상에 있는 건 아닐 거라고, 나처럼 내 자식이 을이 될지라도 감싸주고 지지해줄 마음의 준비를 하는 부모도 있을 거라고, 꼭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보드라운 아이 손을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