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간사히 공항에 도착하자 신이 나서 앞장선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큰아이는 와 봤던 사람처럼 전광판 보면서 척척 짐도 잘 찾고 나에게 ‘엄마 이쪽이야 이쪽’이라고 안내를 했다. 남편이 같이 못 가니 내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큰 아이가 어리둥절해 있는 엄마를 이끌고 다녔다.
공항에서 호텔 근처 난바역까지 가는 라피트 열차를 타야 하는데 어느 플랫폼에서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했다. 우리가 차표를 들고 이 열차 저 열차 앞에서 서성이니 일본 청년이 와서 말을 건다.
“라피트? 디스 이즈 낫. 넥스트 원, 넥스트 원.”
다음 거를 타라고 알려 준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 우리 셋은 서로를 보고 씩 웃었다. 라피트를 타고 난바역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아이들은 주위 풍경을 보며 여기가 일본이구나 신기한 듯 둘러본다. 엄마, 저것 좀 봐, 이것 좀 봐, 연신 말 거는 아이들의 분위기에 맞춰 주고 싶은데 갑자기 우울한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엄마는 지금 열차 방향 반대로 앉아 있잖아. 고개 돌려서 뒤돌아보는 거 어지러우니까 자꾸 이거 보라 저거 보라 하지 마.”
갑자기 차갑게 말하니 아이가 무안한 얼굴이 된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왜 뜬금없이 지난주 일이 다시 떠올라 우울해지는 걸까?
일본에 오기 한 주 전에 논술 전문 학원에서 면접을 봤었다. 원장은 친절했고 새로 오픈한 학원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고 깔끔했다. 근무 조건이나 대우도 괜찮았다. 면접을 보고 바로 채용이 결정됐다. 그런데 문제는 퇴근 시간. 밤에 9시에 와야 했다. 둘째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 저녁도 문제였다. 알아서 차려 먹으라고 하기에는 어려 보였다. 밤새 뒤척이며 고민하다가 안 하겠다고 전화를 하니 원장이 무척 아쉬워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수가 있을까? 안 하겠다고 말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이들이야 적응하기 나름인데 너무 섣불리 판단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큼 전문화된 학원에서 마흔 넘은 강사에게 그만큼 강력한 러브콜을 보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유명 강사가 아닌 한, 학원가도 젊은 사람을 선호하는데 나이 든 강사를 불러주는 곳은 근무 조건이 열악하거나 학원이 영세하거나 그런 경우가 많았다. 육아 때문에 공백기가 생긴 입장에서는 다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꽤 괜찮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저녁 늦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다시 전화를 했다. 혹시 아까 했던 이야기를 번복할 수 없는지 물어봤다.
“어머, 어떻게 해요? 못 하신다고 하셔서 그간 면접 본 중에 두 번째로 마음에 뒀던 분한테 연락해서 근무하시기로 했어요. 죄송해요.”
창피함을 마다하지 않고 전화한 건데 그렇게 거절당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솔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엄마 이제 말해도 돼? 머리 안 아파?”
작은아이가 눈치 보며 묻는 걸 보니 먼 일본까지 와서, 라피트 열차에 몸을 싣고 단정한 집들을 보면서 울적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아니야, 엄마 이제 괜찮아. 얘기해.”
내가 웃어 보이니 금세 환해지는 아이들 얼굴. 이렇게 엄마 바라기인 아이들. 엄마라는 햇빛을 보면 고개를 쭈욱 빼고 활짝 피고 엄마라는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면 금방 풀이 죽고 시들해진다. 일본까지 와서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힘을 내보기로 했다.
“우리 첫 번째 행선지는 킨류 라멘이야. 라면으로 유명한 곳인데 찾아갈 수 있을까?”
“엄마, 걱정하지 마. 구글맵만 켜면 된대.”
큰아이가 구글맵을 보며 따라간다. 핸드폰과 거리를 번갈아 보는 눈빛에 생기가 넘친다.
“여기서 오른쪽 같은데, 한번 가볼까?”
“그래 아니면 다시 돌아오지 뭐.”
쾌청한 오사카 하늘 아래 우리 셋은 길을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맞췄다.
“간판을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야. 킨류 라멘은 간판이 용 형상이야. 용이 있는 곳을 찾아봐.”
“어? 엄마 저기야, 저기! 저기 용이 있어!”
작은아이가 신나서 외친다. 글자 한자 몰라도 용케도 찾아낸다. 보물섬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셋이 얼싸안고 기뻐하며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정작 라면은 유명한 집 치고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낯선 거리에서 목적지를 찾았다는 뿌듯함이 컸기에 개의치 않았다.
패키지여행만 고집하다 나이 마흔 넘어 첫 자유여행이라니, 참 늦은 시도였다. 그 늦깎이 시도에 아이들이 있다는 게 예상외로 큰 힘이 되었다. 큰아이는 미로 같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도 눈썰미 있게 길을 잘 찾았고 영어로 재빨리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대신해주기도 했다. 작은아이도 사소한 심부름이라도 하려고 애썼다.
유니버설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 할아버지가 내비게이션도 없이 길을 헤맸다. 우리가 영어로 이야기하면 할아버지는 계속 일본말로 뭐라고 떠들면서 화를 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호텔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대신 통화하게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날은 깜깜해졌는데 숙소랑 점점 멀어지는 거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대체 할아버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불안하기만 했다. 아이들도 데리고 있는데 혹시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별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엄마, 이거 봐봐. 호텔로 향해 가고 있는 것 같긴 해. 길을 좀 헤매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큰아이가 침착하게 구글맵을 켜서 보여주었다.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큰아이 어깨에 기대서 작은 아이가 잠들어 있고 큰아이는 계속 핸드폰을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차분하게 대처하는 아이를 보니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공부 안 한다고, 책상 어질러 놓는다고, 과자 껍데기 아무 데나 놓는다고 숱하게 잔소리를 듣던 아이 맞나 싶었다.
한국을 떠날 때는 학원 일 때문에 복잡한 심경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데 아이들과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내가 왜 그 일을 하기 망설였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와 재잘재잘 이야기 나누며 함께 밥 먹는 걸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 저녁도 못 챙겨주고 밤늦게 들어오는 엄마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거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고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거다. 이렇게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아이들로 잘 키우는 게 내가 당장 사회로 복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그렇다면 자꾸 곱씹으며 아쉬워할 것도 없으리라.
간사히 공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오사카도 안녕이라고 하자 아이들은 서운한 얼굴을 한다. 큰아이의 성화로 시도한 첫 자유 여행. 짧은 일정이었지만 남들이 안내해주는 대로 다녔으면 챙기지 못했을 추억의 장면들이 무척 많다.
‘네가 함께 했기에 엄마가 늦은 나이에 조금 ‘성장’한 느낌이 드네. 어른 몫 하는 너를 보면서 놀라기도 했고 심란했던 마음도 정리됐어. 고맙다. 다음에 또 멋진 추억을 남기자.’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혼자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