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란 단어가 주는 어감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누가 먼저 부여한 정의일까? 산업화 시대 형성된, 젊은 청춘의 노동력만 강조하던 오래된 기류와 ‘여성 혐오’라는 새로운 기류가 맞물린 결과일까? 아줌마 하면 버스에서 자리를 뺏고 남들 다 줄 서서 기다리는데 새치기를 하거나 물건 값을 터무니없이 깎는 등 욕심 많고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가난한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당당하게 ‘아줌마가 아니라 사모님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사람들은 도로에서 민폐 운전자를 보면 확인도 안 하고 ‘아줌마’ 일 거라 단정한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중년의 여인이 된 게 무슨 죄도 아닌데 우리 사회는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친 여성들에게 유독 날을 세우며 깎아내리려 든다. 무례하고 천박하게 구는 사람이 비단 ‘결혼하고 아이 낳고 나이 든’ 여성들 중에만 있겠는가. 젊은 남녀 중에도 있겠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나 할아버지 중에도 있을 수 있다. 사람 나름의 문제인데 ‘아줌마’들을 몽땅 싸잡아서 몰지각한 집단 취급을 한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사람들인데 말이다.
아줌마들을 비난할 때 등장하는 단골 멘트는 ‘할 일 없이 카페에서 수다나 떨고 있다’는 문장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학교로, 회사로 보내고 잠시 두런두런 앉아서 모닝커피 한잔 하는 것을 여유 있게 바라봐주지 않는다. 심지어 여성들이 썼다는 자기 계발서에서도 ‘동네 아줌마들과 할 일 없이 수다 떨지 말라’며 경멸하는 말투로 지적하는 내용이 나온다.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란 책을 통해 아우슈비츠에서의 극단적인 체험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체온을 나눌 ‘친구’를 원했다고 한다. 지옥문 앞에 선 것 같은 그 순간에도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줌마들에게 동네 아줌마와의 수다는 단순히 시간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학교로, 직장으로 가버린 사람들의 빈자리를 잠시나마 잊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상대를 만나 어제의 후회나 보람, 오늘의 갈등, 내일에 대한 불안과 설렘 등 모든 희로애락을 나누는 자리이다.
혹자는 그런 나눔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 만큼 끊임없이 누군가와 교감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아닌가. 아줌마라고 해서 혼자 고립되어 지내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요즘에는 온갖 상담 센터가 성행하고 있다. 속 터놓고 말할 친구를 돈 내고 구하는 시대이다. 언젠가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소위 성공한 사람들 중에 내 고객이 매우 많다. 맘 터놓을 친구가 없어 나처럼 돈으로 구한 친구에게만 고민을 말한다”며 좋은 말벗을 갖는 일에도 소홀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유료 친구’ 대신 아줌마들의 답답한 속을 같은 아줌마가 듣고 달래며 ‘무료로’ 풀어주는 게 문제 될 이유가 없다. 쓸데없는 불안은 가라앉혀 주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다독거려 주기도 하며 모처럼 설레고 행복한 일에는 공감도 해준다.
아줌마들의 수다는 생각보다 전 방위적이다. 시댁에 가서 뼈 빠지게 일하고 와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놓기도 하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드는 사춘기 아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심정을 쏟아내기도 한다. 어젯밤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썰전’을 언급하며 작금의 돌아가는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는 교육 정책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중년이 된 그녀들은 엄마들 간의 끈끈한 동지애를 경험했기에 서로를 더 잘 다독여줄 수 있다. 때로는 남편보다 더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다. 특히 아이 문제에 관한 한 속 터놓을 수 있는 이웃집 아줌마 한 명은 꼭 필요한 것 같다. 의외로 남편들은 아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속상한 마음 때문인지 화를 낸다. 아내 입장에서는 같이 문제를 헤쳐 나가자고 이야기를 꺼낸 건데 남편이 ‘그러게, 내가 진작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했잖아’라고 지적하거나 비난하면 말문이 막히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아이는 엄마의 성적표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생명체이다. 육아서에서 이렇게 하면 분명히 아이가 어떻게 클 거라고 했는데 닥쳐 보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문가도 똑 떨어지게 단언하기 어려운 우리 아이 육아 지침을 ‘작은 인간’을 처음 키워 보는 초보 엄마가 어떻게 완벽하게 세우겠는가. 하다 보면 시행착오도 겪고 그래서 아이한테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겨서 방향을 틀어야 하는 순간도 온다. 이런 상황을 남편보다 이웃집 아줌마가 더 잘 이해하고 격려해 준다.
육아를 짐스러워하던 나에게 ‘엄마 놀이’를 재밌게 해 보자고 다독여주던, 나보다 몇 살 많았던 한 엄마가 생각난다. 내가 아이를 재우다 찬 바닥에서 잠들어 많이 아팠을 때는 손수 만든 죽을 갖다 주기도 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찬 바닥에서 잠들어 버렸어?’라며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모습에 괜히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남들 다 키우는 아이 키우면서 뭐 그리 힘들다고 유난이냐 타박하지 않고 육아의 길이 얼마나 고단한지, 얼마나 외로운지 이해해 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당시에 참 힘이 되었다.
세상 일에는 양면성이 있는 만큼 이렇게 친밀하고 인간적인 아줌마들이 있는 반면 경쟁적이고 살벌한 아줌마들도 있다. 자식 일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오직 자기 자식 싸고도는 데 급급한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이런 아줌마들과는 수다를 떨고 싶지 않다. ‘기승전 성적’ 이야기고 자식 자랑이다. 누가 공부를 잘하네, 못하네 질투를 하거나 흉을 본다. 아이의 인성발달에 관해선 무관심하다. ‘위층 아줌마 입고 다니는 게 추레해서 우습게 봤는데 아이가 그렇게 공부를 잘 한 대’라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하는 걸 보고 오만정이 떨어진 적도 있다. 아마 이런 부류의 아줌마들에게 나는 그다지 매력적인 대화 상대가 아닐 것이다. 자식 공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스타일도 아니라 딱히 캐낼 정보도 없고 그렇다고 화려하거나 부유해 보이지도 않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더구나 중년이 되어서 모든 이에게 호감을 주려고 애쓴다면 안쓰러워 보일 것이다. 자식 키우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나 사는 이야기를 교감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 두어 명이면 족하다.
오늘도 달력을 보며 약속을 잡는다. 어떤 사람과는 주로 자식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과는 책 이야기를 한다. 운동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식당에서 메뉴를 선택하듯 결이 다른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선택한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다 똑같은 아줌마로 보일지 모르지만 각자 삶의 문양이 다른 아줌마들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는 그녀들의 수다에 나는 오늘도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