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학로에 갔다. 아이들과 조금은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서울 나들이를 실행에 옮겼다. 큰아이는 아이돌 공연도 보고 이튿날에는 온 가족이 대학로 연극을 보았다. 작은아이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연애물이 다수인 공연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할 수 없이 동화를 원작으로 한 어린이 대상 연극을 보았다.
별 기대 없이 본 공연이었다. 많이 지루하면 살짝 눈 감고 쉴 생각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자꾸 커가는 아이를 두고 엄마는 가버린 시간을 아쉬워하고, 아이는 엄마 품을 떠날 생각에 안타까워하는 장면에서였다.
새 생명을 임신하고도 기뻐하기보다는 우울하고 힘들어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뱃속에서 자신이 힘찬 발길질을 하는데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를 바라봤을 아기를 생각하니 미안했다. 동시에 낯선 곳에서 사회적 관계가 다 끊어진 채 외롭고 힘들었을 철없던 임산부도 안쓰러웠다. 누가 특별히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아기도, 엄마도 다 안타까운 처지가 되었을까?
극 속에서 엄마로 분장한 배우는 힘차게 노래 불렀다.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지. 그러나 꿈은 저 멀리로 가버렸어. 하지만 조금도 후회는 하지 않아. 나에겐 보석 같은 아이들이 있으니까.”
옆에서 같이 보던 큰아이가 갑자기 묻는다.
“엄마도 저런 생각해? 꿈은 사라졌지만 우리가 있어서 후회 안 한다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뭔가 빨리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얼른 생각이 안 난다. 당황하는 나를 다독이듯 큰아이가 어깨를 감싸며 말을 잇는다.
“괜찮아. 저렇게 생각 안 해도 상처 받지 않아. 사실 엄마가 후회하는 거 다 알고 있어. 엄마 이미 말했어. 좋은 직장 다녔는데 지방 내려와서 못 다니게 되었다고. 우리 낳고 키우느라 일할 기회 많이 놓쳤다고. 엄마가 그렇게 생각해도 상처 받지는 않아. 사실이 그랬으니까. 그런데 너무 한탄하고 있지는 않으면 좋겠어.”
어른처럼 이야기하는 아이를 놀라서 바라보는데 아이는 속사포처럼 말하고선 바로 앉아 공연에 집중한다. 아이의 반응에 얼떨떨한데 배우들은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신나게 노래 부르며 공연장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나의 갈등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현재 진행형이다. 누군가가 엄마 된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도, 그렇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것이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때,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작고 사랑스러운 입술을 바라볼 때, 혼자 아침 체조한다고 갸우뚱거리는 아이의 작은 어깨를 바라볼 때,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이들은 분명히 너무 사랑스럽다. 하지만 결혼과 독박 육아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커리어를 포기한 자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사회적인 성취나 인정을 소중히 여겨왔던 자신을 망각했던 것에 대해 스스로 용납을 못하고 있다.
아이의 속사포 같은 훈계를 듣고 보니 이제는 나를 좀 편안하게 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열망이 너무나 강렬해서 다른 것들을 미처 보지 못한 것. 젊음은 그런 거다. 미숙하고 실수한다. 자신의 한계나 특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게 하면 어떤 면이 불행하고 어떤 면은 행복할지 치밀하게 계산하지 못한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을지언정 구체적으로 실감하지 못한다. 다만 젊었을 때는 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거다. 그렇게 스스로 다독여야지, 과거를 끌고 다니면서 언제까지 자신을 책망할 수는 없다. 그러면 현재를 살지 못한다.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모르기에 겁 없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신은 우리 삶의 연속성을 위해 미숙한 젊음이 용감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