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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4. 2018

부엌을 선택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지금

문정희 시인의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시가 있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 하고 특별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들,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묻는 내용이다. 시인을 만나서 ‘제가 그 여학생입니다만’하고 말을 걸고 싶은 심정이다. 아마 ‘평범한 아줌마’의 옷을 입게 된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아줌마의 소소한 일상에도 그 나름대로 즐거움은 있다. 도톰한 수면양말을 신은 아이의 사랑스러운 곰발바닥, 동네 엄마들과 여유로운 차 한 잔 마실 때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 수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듣게 된 오래전 유행가. 침대에 파묻혀 읽는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등. 콧노래를 부르게 되는 일상이 내게도 존재한다.

하지만 문정희 시인이 지적했던 것처럼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한 채, 세상은 빙글빙글 정신없이 돌아가면서 변화하는데 나 혼자 도태되는 건 아닌지 불안이 엄습할 때도 있다. ‘전업주부’가 무어 그리 죄지은 이름도 아닌데 위축될 때가 있다.


예전에 중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나갈 때 나를 무척 잘 챙겨주신 나이 지긋한 음악 선생님이 있었다. 나이 차는 많이 났지만 일하면서 아이 키우는 고충도 같은 여자 입장에서 잘 이해해 주시고 ‘비정규직’으로서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에도 공감해 주셨다. 내가 일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매일같이 눈물 바람인 큰 아이 때문에 힘들어할 때에도 진심 어린 위로를 해 주셨다. 그런데 하루는, 직장 다니는 자신의 딸이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다며 무심코 한 마디 던지셨다.


“아유, 우리 딸 생각하면 내가 골치 아파. 똑똑한 딸을 두면 엄마가 마음고생해. 능력 없는 딸이었으면 내가 머리 아플 일도 없지. 능력 없으면 집에서 애나 키울 텐데.”


나도 같이 일하는 엄마의 대열에 있다고 생각해서 한 이야기였겠지만 선생님과 나의 입장은 달랐다. 나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한시적 ‘직장맘’이었다. 그런 내 앞에서 ‘능력 없는 여자’ 운운한 것은 상처가 되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편의상 ‘전업맘, 직장맘, 재택근무맘’이라고 명명했을 때, 세 가지를 다 해 본 나로서는 전업맘이 제일 힘들다고 단언한다. 집에서 노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잠시지만 직장맘일 때도 힘들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정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아야 했다. 이 세상 직장맘들, 아픈 애 어린이집에 등 떠밀어 들여보내 놓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랴. 입주 도우미를 쓰거나 친정 부모가 옆에 살면서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는, 직장맘들의 로망대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도 자식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미안함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업맘이 힘들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인 시선 때문이다. 능력 있는 전업맘들도 많다. 내 주위에만 해도 전문 통역사인데 집에서 아이들 키우는 데만 몰두하는 사람도 있고, 인근 연구소에 너무 괜찮은 일자리가 있었는데 하루 출근하고 그만둔 사람도 있다. 직장에 나가느라 유치원 종일반에 아이를 맡겼더니 저녁 내내 유치원에서 아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도 텔레비전을 또 보여 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보고 과감히 하루 만에 사표를 냈다. 그런가 하면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보여 직장을 포기하는 사례도 있다. 날이면 날마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거나 선생님께 반항하는 등 심각한 문제 행동을 보여서 아이와 상담 치료 센터를 다니고 밀착 지도한 끝에 아이는 많이 나아졌다. 엄마가 사표를 낸 후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돌보고 키울 때 엄마에게만 많은 짐을 지운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며 아이 키우기를 유예할 수도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가정을 택하고 사회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 시간을 놓칠 수 없어, 직장을 내려놓기도 한다. 단순히 능력이 없거나 놀고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부엌을 선택한 여학생. 그 여학생의 선택도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그 선택이 떠밀리듯 한 것일지라도, 아이 키우기 척박한 환경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 것일지라도 아이들과 가정을 지키고 싶은 진심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장에 적을 두기만 한다고 능력이 발휘되는 게 아닌 것처럼 가정에 있다고 해서 능력을 꼭 썩히는 것도 아니다. 가정의 대소사를 두루 살피고 아이들을 챙기고 키우는 것도 ‘종합예술’에 견줄 만큼 복합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 직장에도 게으른 사람, 열심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게으른 사람, 열심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쩌다 눈에 띈 직무태만인 전업주부의 한두 가지 사례를 들어 전업주부는 노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는 바뀌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컸을 때는 어떤 명함을 갖고 있느냐보다 가정주부든, 직장 여성이든, 자신이 어떤 행복을 추구하냐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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