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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하람 Feb 23. 2024

드러나는 존재

겨우 쓰레기통 하나

길거리를 걷다가 쓰레기통을 발견하면 주위를 돌아보는 버릇이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쓰레기통이 있는 곳 주변이 다른 구역보다 깨끗하다는 가설이 있었고, 그 가설을 검증하다보니 생겨난 버릇이다. 수십 번 둘러보면서 쓰레기통이 있는 곳은 다른 곳에 비해 주변이 깨끗하다는 가설이 수용되었고, 그 뒤로 주변을 둘러보는 버릇은 점차 사라졌다. 도시의 청결함은 쓰레기통의 희생이다. 쓰레기통은 주변의 더러움을 온몸으로 받아주어 주위를 깨끗하게 한다. 평소에는 있으나마나 별 생각이 없지만 손에 휴지조각이나 다 뜯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을 때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통 하나의 희생으로 손은 자유를 얻는다. 더러운 것들을 기꺼이 온몸으로 떠안는 희생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떠오르게 한다. 


  쓰레기통은 자신의 온몸을 내주어 주변을 청결하게 하면서도 아무런 티를 내지 않는다. 그저 길 한쪽에 묵묵히 서있을 뿐 자신의 희생을 과시하지 않는다. 겸손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겸손이 힘든 이유는 자신의 공(功)을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인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범인(凡人)들은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 언제 드러날지 모르기 때문에 성급하게 먼저 드러내버린다.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참기 어려운 마음은 이해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내는 존재보다 드러나는 존재의 아름다움은 더더욱 빛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는 존재를 들여다보면 조급해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대비되어 보인다. 그 안에서 악취가 난다고 인상을 찌푸리지만 사실 그 악취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향한 꾸짖음이었을 것이다.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말없이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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