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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필런 Nov 08. 2018

무언가의 ‘얻음’은 무언가의 ‘포기’이다.

둘리에 나오는 고길동 아저씨는 사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새삼스럽게 20년도 훨씬 지난 옛 추억의 만화 ‘둘리’가 최근 재조명받았었다.

‘엄마를 찾으러 다니는 외로운 둘리’보다 온갖 구박과 꼰대질을 일삼는 ‘고길동’이 차라리 더 불쌍하다면서 말이다. 처자식뿐만 아니라 조카인 희동이 그리고 주변에 수많은 외계인을 포함해 옆집 백수청년 마이콜까지, 수많은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회사생활까지 해내는 '가장 고길동'.

만화 '둘리'에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가장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여러 가지 역할들을 잘 해내기 위해 매번 자신의 삶을 포기해 가며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한 고길동이 재조명되냐고?


그것은 바로 둘리가 한참 방영되던 당시 주 시청자였던 꼬맹이들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사회에 내 던져진, 고길동이 겪는 고난을 피부로 느끼는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둘리가 약 88 올림픽 즈음 엄청난 인기가 있었으니, 대략 그 당시 유치원생이나 국딩이었다면 이제는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냈거나 적어도 그즈음의 학부모가 되었을 터이니 말이다.


이처럼 나이가 들고,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야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리고 내가 고길동의 모습을 새삼 회상하며, 나이를 먹어보니 알게 된 선명함은 그저 ‘가장은 힘들다’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힘든 직장인이자 맡은 역할이 많은 가장인 고길동이었지만, 힘들게 그 역할을 다한 고길동을 주변 사람들 모두가 좋아하고,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고길동이 비록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다만 좋은 가장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서로의 교환 관계가 대등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무언가 획득한다’는 것에 대해 반드시 ‘무언가의 포기함’을 요구하는 것 같다는 선명함이 든다.



드라마 주인공 같던, 나의 대학시절 '기숙사 방장' 이야기


대학교 새내기 시절 내가 살던 기숙사의 방장(4인실 기숙사실의 가장 고학번을 지칭한다)은 자신의 말을 빌어보면 ‘가진 거 쥐뿔도 없는 시골에서 혈혈단신 올라온 촌놈’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신파극의 주인공이었다. 그저 허구한 날 술 먹고 노느라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이 안타까웠던 나에게 방장형이란, 그저 드라마에서나 보던 약간은 찌질한 아저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아저씨라 하기엔 복학생이었던 그도 겨우 27살 먹은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항상 술에 반쯤 취해 바라본 그의 모습은 나에게는 그저 영락없는 아저씨였다.


그는 항상 헤벌쭉 웃는 모습이었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주변과 인사 한번 나누는 사람 없는 매일 혼자였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방에서 또 공부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래서 나는 방에 잘 안 들어갔었더랬다. 무언의 공부에 대한 압박을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를 먼발치에서 볼 때라도 치면 나는 그저 그가 한심하고 답답했다. 언젠가 나에게 어수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맨날 놀면 뭐가 좋아?"라고 묻던 그 방장에게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출처 : tvN 응답하라 1994 중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어찌 된 영문인지 방장 아저씨는 기숙사 방 졸따구들에게 갑자기 치킨과 맥주를 주문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방에서 공부만 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내 나는 치킨보다 두배는 족히 비싼 족발을 덥석 주문했더랬다. 얼마 후 뭔가 가늠할 수 없는, 공기마저 긴장하고 있는 듯한 방 분위기에서 우리는 족발 앞에 둘러앉아 그 아저씨가 조근조근 말하는,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건조하기까지 한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족발 씹는 소리만 들리던 잠깐의 정적을 깨고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의 말은 중언부언 길었지만 결론은 오늘 자기가 원하던 직장 두 군데나 모두 붙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직장은 실로 대단했다. 나처럼 날라리 대학생도 알만한 그 어렵다는 금융계 공기업 두 곳에 모두 합격한 것이다. 그저 자신은 그냥 월급 더 많이 주는 곳에 간다고 말하며, 너무 기쁜데 고향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누구 한 명 기쁜 소식을 전할 곳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는 아래를 바라보며 싱긋 혼자 웃고는 이내 기숙사 방에서 담배를 태워 물었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이내 부끄러워하는 웃음의 의미를 그때의 나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고 나는 그와 무덤덤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가 떠난 그의 자리에는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짐작이 될 정도로 시트에 엉덩이 모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볼썽사나운 의자와, 책상 한 구석 그를 닮아 개성이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필체로 쓰인 ‘한국은행’이라는 네 글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을 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 나의 무언가를 포기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친구 하나 없이 4년의 대학생활을 공부만 하며 보낸 그는 만족한 삶을 살았을까?



얻음과 포기에 '정의(正義)'가 어디 있나? 자기 마음이지


출처: YTN 뉴스


어떠한 포기 또는 얻음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답도 없거니와, 또한 이에 대해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한없이 무의미하다. 각자의 '삶'과 그들만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히 쉽게 논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금 분명한 것은, 그 누구의 삶 일지라도 무언가를 얻길 위해서는 무언가를 포기하게끔 만들고, 반대로 무언가를 포기하면 또 무언가를 자신에게 건네준다는 것이다.


둘리가 한참 방영하던 시절의 꼬꼬마 꼬맹이들은 나이가 들어 차갑고도 냉소적인 사횟물을 먹으며 고군분투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불현듯 둘리의 고길동을 생각하며 그에 대해 되돌아본다. 만만하지 않은 세상은 포기와 얻음이 하나의 '패키지'였구나.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출근길에 나서는 우리는 소중한 하나를 얻기 위해 또한 소중한 하나를 포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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