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님들은 '좋은 아침'이 있는 줄 알았어요
어느 날, 갑작스러운 휴가를 내었다.
물론 팀원들의 눈치가 많이 보였지만 나에게 이 정도는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2주일 동안은 마감으로 거의 매번 야근했기 때문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아주 가끔씩은 지금처럼 별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정도 평일 휴가를 쓰는 편이다. 나는 지극히도 평범하고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평일 휴가를 진정으로 좋아한다.
맞벌이를 하는 우리는 일찌감치 처갓집 옆으로 이사를 갔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장모님과 비공식 계약을 맺었고, 장모님은 그때부터 아침마다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하신다. 주변에서는 그런 우리 집을 부러워한다. 그렇게 아이를 등교시켜주시는 조부모가 계신다는 것은 지금 같은 척박한 사회에서 어찌 보면 꽤 운이 좋기 때문이다. 나의 휴가는 곧 장모님의 휴가이기도 하다. 어제저녁 퇴근하면서 갑작스레 휴가를 통보받은 장모님의 목소리는 분명 한껏 들떠 계셨다.
아침에는 늘 전쟁터이다.
나와 와이프는 출근 준비를 하느라 각자 바쁘다. 장모님은 아이를 깨우고 아이의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느라 바쁘시고, 우리 부부는 아이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출근을 한다. 그 이후의 시간은 알 수 없다. 어떻게 세수를 하고 어떤 옷을 입고 가방을 어떻게 메고 나가는지. 그렇게 부모역할도 제대로 못한 채 아이는 1학년이 되었다.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는 평일 휴가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아이가 1학년이 되고 나서 첫 번째 평일 휴가라는 점이다. 유치원 때만 하더라도 조금 늦게 등원하는 것은 별로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등원했던 가방을 그냥 다시 둘러메고 가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가끔 하루 정도는 유치원을 째고 이리저리 놀러 가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라는 압박감은 매우 컸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될 것 같은 부담감. 그리고 준비물은 뭐가 이리도 많은지. 시간표를 보며 챙기기도 바쁜데, 오늘은 방과 후 활동도 두 개나 있는 날이란다. 배드민턴 라켓에 지점토, 앞치마까지 챙겨야 한다. 와이프는 평소처럼 출근 준비에 바쁘다. 물론 그 와중에 등교 준비를 도와주며 나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와이프는 이미 떠났다.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소시지 볶음밥을 해주려 했었지만, 결국 밥에 김가루와 참기름 몇 방울만 넣은 전투식량을 줄 수밖에 없었다. 8시 40분. 어떻게든 집에서는 나왔다.
학교가 단지 내에 있는 아파트를 선택해 이사를 온 나에게 잠시 칭찬을 하면서 아이의 손을 잡고 뛰었다. 항상 적막하게 느꼈던 초등학교 정문은 북새통이었다. 이곳이 이렇게 사람 냄새나는 공간이던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학교를 걸어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바라보며 주책맞게 나오는 눈물 한 방울을 훔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등교의 마지막을 장식해서일까? 문득 둘러본 학교 정문 근처는 다시금 적막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너무 정신이 없던 터라 간만에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수없이 하며 집 현관에 들어섰다. 집에 들어서며 나는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도둑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온 집안은 난장판이었다. 와이프가 출근 준비를 한 잠옷과 수건들, 널브러진 화장대는 그나마 봐줄 만했다. 바닥에 떨어진 전투식량 부스러기들과 이리저리 열려있는 서랍, 아이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는 옷의 허물들. 미처 끄고 나가지 못한 주방의 환풍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여유로울 것 같았던 오전의 커피타임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집안 청소와 정리는 오전 내내 이어졌고, 나의 아침식사도 남은 전투식량으로 해결했다. 그나마도 김가루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소태맛이 났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가방에 물병을 넣어줬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싱크대를 바라보았더니, 아이 가방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물병이 그곳에 처량하게 올려져 있었다.
12시 40분. 그래도 나에게는 아직 2시간이 남아있다.
냉장고에 붙여져 있는 아이 스케줄표에 의하면 그러하다.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터에 평일 휴가의 오전은 날아갔으나 남은 2시간만큼은 세상 모든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진작에 사두었던 자동차 잡지를 들고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새로 오픈한 지 두 달 남짓한 그곳, 나는 퇴근하며 그 카페를 보며 항상 걱정을 했더랬다. ‘저렇게 손님이 없어서 얼마나 버티려나?’ 하지만 평일 12시 40분, 그 카페는 빈자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동네 엄마들이 삼사오오 모여 치열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슬리퍼에 무릎 나온 츄리닝을 입고 온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여 카페에 들어갈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시간상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잡지를 보기 시작했지만 내 귀는 금세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드라마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뒷담화로 대화는 시작된 듯했으나 이내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교육으로 모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고급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오늘 아침 등교가 바빴던 이유가 시든 강낭콩이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아이는 며칠 전부터 집에서 강낭콩을 키우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왜 이런 것까지 키우는지 평소에 나는 내심 불만이었다. 그리고 하필 오늘따라 더 시들어 보이는 강낭콩 때문에 아들은 아침부터 한바탕 울어재꼈었다. 그들의 대화에서는 바로 그 강낭콩이 나왔다. 한 엄마가 죽어가는 강낭콩도 하루아침에 살릴 수 있는 비법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나의 귀동냥은 계속되었고 그 엄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오!’라는 감탄사를 내기까지 했다. 전국 대부분 모든 1학년이 강낭콩을 키운다는 새로운 사실 역시 이때 알게 되었다.
2시 30분. 다시 학교로 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학교 정문은 다시 북적거렸다.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과 그 앞을 지휘하는 몇몇 어머니들. 그들의 형광 조끼 앞자락에는 ‘어머니폴리스’라는 문구가 써져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도 녹색 조끼를 입은 ‘녹색어머니회’가 있었다. 저 멀리서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실내화 가방에 배드민턴 라켓에 방과 후 수업에서 만든 작품까지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아이를 한걸음에 맞아주었다. 아이의 짐을 다 둘러메고 나니 꽤 무거웠다. 주변은 더욱 북적이기 시작했다. 노란색 학원차와 도복을 입고 있는 태권도 사범들까지 어우러져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또 어딘가로 실려가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3시부터 영어학원이 계획되어 있다. 마음만은 ‘아들! 오늘은 학원 째고, 아빠랑 놀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학교 앞 빵집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이고는 정문 앞 학원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나에게 또 1시간이 생겼다.
어디를 들어가기도 애매한 시간인지라 학교 앞 그늘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군데군데 엄마들의 무리는 다시 생겨났고, 그들의 대화는 또 치열했다. 어머니폴리스들은 여전히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좋은아침 같은 소리 하고 있네’는 직장인들에게만 쓰고 싶은 글이었다. 하지만 전업주부에게도 아이에게도.... 좋은 아침은 없어 보였다. 모습과 장소만 다를 뿐,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안필런입니다.
위클리 매거진 '좋은아침 같은 소리 하고 있네'가 아마도 다음번 글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D
위클리 매거진이 연재가 완료되더라도 제 브런치에 이어서 글을 연재할 예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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