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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필런 Jun 29. 2019

'워킹맘'과 '저출산'

좋은 아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_ 직장인 헛웃음 에세이  


마케팅팀 최 과장의 보고서는 오늘 또 빠꾸를 먹었다. 


누가 봐도 더 이상 손볼 것이 없는 그의 보고서였지만 부장님은 내용은 보지도 않고 ‘다시!’를 외쳤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번 보고서의 최종 결재권자인 박 이사님이 최근 모 부서의 보고서를 보고 아주 흡족해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보고서의 핵심은 바로 폰트였다. 가독성이 높다고 알려진 새로운 폰트를 사용해 큰 글씨체로 보고서를 작성했더니 내용은 보지도 않고 폭풍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이사는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큰 글씨의 보고서에 대해 혹평하며 반려했던 인물이다. 성의가 없다나 보기가 어렵다나. 그뿐이 아니다. 뭐에 뒤틀렸는지 원하는 대로 수정을 해주었는데도 몇 주간 읽어보지도 않다가 나중에는 왜 보고서를 안 올리냐고 화를 버럭 내었었다. 그의 마지막 멘트는 ‘변명하지 말라’ 였다고 전해진다. 


모든 부하직원들은 그를 보고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라도 그의 면전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는 인사권을 가진 자이니까. 새로운 폰트를 입히고 크기를 크게 한 보고서가 부장을 통과해 이사에게 전달되었다. 그 작업 때문에 최 과장은 어제도 야근을 했다. 


최 과장은 두 아이의 엄마이다. 워킹맘이다. 한 녀석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1학년, 둘째는 한참 엄마를 찾을 4살 배기. 최 과장은 아이와 이야기해본지가 만 3일째라고 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니 저녁에도 얼굴을 못 보는 것은 물론, 아침에도 자는 모습만 보고 출근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 자신의 스케줄을 밥 먹듯이 바꾸는 박이사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그녀는 사무실에서 대기해야 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박 이사와의 대면


최 과장은 가까스로 박 이사의 방에 입성했다. 엄청난 돈을 들여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한 지 무려 10년째이지만 대면보고는 아직도 필수이다. 전자결재의 의도는 결재권자들이 온라인을 통해 보고 내용을 확인하고 필요할 때만 대면하도록 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한다. 몰랐는데 네이버에서 검색해보고 알았다. 우리 회사 사람들 역시 아무도 의도를 모르는 듯하다. 여전히 서면으로 보고서를 만들고 거기에 요약본까지 더해 직접 대면보고를 한다. 그리고는 대면보고에서 구두 통과가 되어야 전자결재를 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올려진 대면보고는 단 1분 만에 결재가 끝난다. 왜냐고? 박 이사의 결재 버튼은 박 이사의 비서가 누르기 때문이다. 아마 박 이사는 전자결재시스템 로그인 방법도 모를 것이다. 전자결재의 의미는 물론.


넓고 푹신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듯 앉아있는 박 이사가 보고서를 보며 대뜸 말한다. 

“요즘 워킹맘이 그렇게 힘들다면서요?” 

최 과장은 당황하지 않는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보고서 내용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박 이사는 채 5초도 읽지 않은 보고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보고서를 무심히 책상에 내려두고 말을 이어간다. 

“요즘 주 52시간이다 뭐다 직장인들의 여건이 좋아지고 있으니, 다들 열심히 해 봅시다. 아주 세상이 좋아지고 있어요” 

최 과장도 바로 말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보고서는 전자결재로 올리겠습니다” 


최 과장은 박 이사의 방을 나서며 비서에게 귀띔한다. 

“전자결재 올리라고 하셨어요”




'저출산 문제'는 개그의 영역이 아니다


최 과장과 나는 동기이다. 오랜만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최 과장은 평소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욕을 내뱉는다. 하지만 어울리지만 않을 뿐 아주 익숙하다. 언젠가부터 최 과장은 혼자만의 거친 욕을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듯했다. 마치 내가 욕먹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후미진 식당 벽걸이 TV에서는 저출산 대책과 관련된 뉴스가 나왔다. 저출산 원인의 상당한 이유 중에 하나가 출산과 수유로 인한 몸매 변화라고 어떤 정신 나간 정치인이 말했나 보다. 이를 위해 가슴성형수술에 대한 세제 혜택을 입법 발의한다고 했단다. 간만에 참신했다. 그들이야 워낙에 본분을 망각하고 자꾸 개그의 영역을 침범하니까. 하지만 타이밍이 적절치 못했다. 나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욕을 들어야 했다. 그간 업데이트된 최 과장의 욕을 듣고 있자니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유추할 수 있었다.


최 과장은 자신의 가장 큰 문제가 바닥 치는 자존감이라고 했다. 차라리 연봉이 낮아도 혹은 일이 고돼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루 종일 쓸데없는 일만 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집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부끄러울 때가 많다고 했다. 쓸데없는 일에 치여서 금쪽같은 아이들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고 돈을 벌어오는데, 자신의 속은 썩어 문들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대뜸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말을 싹둑 끊어버렸다. 나까지 “응 맞아 나도 그래”라고 이야기하면 둘 다 나머지 점심을 못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 정신과 진료를 받는 비율이 생각보다 매우 높다고 한다. 야근과 술로 몸의 하드웨어적인 부분이 망가진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제는 소프트웨어까지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회사, 정부의 정책도 사회적인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자꾸 눈에 보이는 것만 고치고 치료하려 할 뿐 내면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다. 저출산 문제도 마찬가지 그저 눈에 보이는 돈, 취업, 시간 등 가시적인 것만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몸매와 가슴까지 가는 것 아닌가. 


아무리 좋은 보고서라도 가시적인 숫자가 빠지면 별로 칭찬을 듣지 못한다. 억지로라도 숫자를 보여주고 산술적인 증가를 보여줘야 한다. 세월호 때도 다들 경험하지 않았던가?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청와대에서는 숫자가 중요하다고, 숫자만 말하라고 했던 것. 지금? 그때보다 나아졌을까? 나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냐고?


대안이 없다 나 역시. 하지만 대안이 없다고 말도 못 한다면 그건 그저 모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이라도 꿈틀 해 보았으면 한다. 그게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나도 종종 박 이사에게 대면보고를 들어간다. 

박 이사는 누군가를 만나면 습관적으로 등을 툭툭  치며 악수를 청한다. 격려를 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퍼포먼스로 해석이 된다. 어쨌든 대면 보고를 한다는 것은 긴장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소변이 마렵다. 잠시 화장실에 먼저 들른다. 일을 마친 후 손을 씻으려던 찰나 아무래도 그가 나를 급히 찾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미처 손을 닦지도 못한 채로 그의 방에 들어간다. 아무래도 한 손으로 악수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두 손으로 공손히 이사님의 악수를 받았다. 그와 나의 손은 축축... 아니 따뜻해졌다. 


다음 대변보고,,, 아니 대면보고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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