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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필런 Jan 14. 2019

치명적인 당신에게

명치 한 대만 때리게 해 주세요. 네?

송구영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그놈의 송구영신 때문에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은 1월을 아주 바쁘게 보낸다.


작년의 것은 보내고 새로운 준비를 해야 한다. 덕분에 지난달에 수주한 나의 사업은 1달 만에 구식 사업이 되었다. 1년짜리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단 1개월 만에 사업 개선사항을 도출해야 했다. 남은 10개월 동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생해야 하지만 1달 만에 새해가 되었기 때문에 금년 사업실적으로도 못 잡는다고 한다. 젠장할.


우리 회사는 1월이 되면 ‘신년 업무보고’라는 것을 한다. 새로운 한 해 동안 어떠한 사업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임원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이다. 불과 몇 주 전인 작년. 내년에는 더 열심히, 효율적으로 일하자던 송년회 때의 다짐은 새해가 되자마자 사라졌다. 업무보고 자료를 만들면서부터.


작년 우리 부서의 실적은 사상 최고를 찍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목표는 초과 달성했고, 이익률 역시 예상치를 상회했다. 올해의 직원상도 우리 부서에서 받았으니 완전히 풍작이었다. 그 풍작이 바로 며칠 전이다. 며칠 전인 작년 종무식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 후로 며칠 뒤. 우리는 내년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되는지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작년처럼 씨 뿌리고, 작년처럼 열심히 해서, 작년과 같은 실적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되겠지? 아니. 불과 얼마 전에 일을 잘할 수 있는 최적의 답을 얻었는데 무슨 새로운 답지를 또 만들어??


정초부터 소설을 쓴다. 한번 보고하고 나면 다시 쳐다보지도 않을 자료를 만든다. 그 뻘짓을 하느라 정초부터 야근을 한다. 운 나쁘게도 1번 타자로 보고를 한 부서장이 탈탈 털려서 나온다. 모든 부서장이 모인다. 뭐가 문제야? 어떤 단어를 담아야 좋아하는 거야? 등 각자의 오답노트를 만든다. 그간 우리가 작성했던 방향이 아닌가 보다.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소설을 쓴다. 보고 날짜와 시간은 무의미하다. 언제 갑자기 불려질지 모르기에 모든 직원들은 대기를 탄다.


드디어 우리 부서 업무보고 시간이다. 부서원 모두가 들어가 임원들과 마주한다. 얼추 숫자도 맞고 이 분위기는 딱 패싸움 각이지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다.


첫 번째 펀치는 시장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주력 고객인 3~50대에 대해 거의 모든 솔루션을 투입해 분석했는데도 부족하단다. 남녀 구분이 빠졌다는 한 임원의 말. 해당 제품은 애초부터 남자 고객을 타겟팅해서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아야 하는 자리이기에 우리는 ‘네 차후 보완하겠습니다’라는 정석 같은 멘트를 내어드렸다. 자신이 치명적인 펀치를 날렸다고 생각하는 듯 그의 표정에 웃음이 흐른다. 정말 치명적이다.


두 번째 펀치가 압권이다. 요즘은 사회공헌, 즉 CSR이 필수란다. 사업성도 중요하지만 사회공헌 차원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라고 한다. 아아.. 2주 전 연말 결산 때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돈만 벌어오면 된다고, 뭘 해도 좋으니 숫자만 맞추라고 했던 양반 아닌가. 국영수 중심으로만 공부하라고 해서 열심히 성적 올렸는데 갑자기 미술 성적을 가지고 오라면 어쩌라는 것인가. 우물쭈물하는 우리 부서원을 보고 그도 씩 웃었다. 그의 표정도 치명적이었다.  


이미지 출처 : tvN 드라마 '미생'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전체 부서의 보고가 끝이 났다. 며칠 뒤 업무보고의 답장 격인 대표이사의 피드백 메일이 왔다. 피드백이라기보다는 그저 전 직원에게 보내는 통보 메일이다. 궁서체로 타이핑된 그의 글에는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이 잔뜩 적혀있다. 직원들은 아무도 그 글을 읽지 않는다. 그저 제일 마지막 문구를 향해 스크롤을 내릴 뿐이다. 그거만 읽으면 된다.


‘올해는 전사적으로 8% 성장 목표를 정했습니다. 문제는 업무현장에 답은 여러분께 있습니다. 올 한 해도 열심히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8% 정해져 있었으면서 뭐하러 업무보고를 받았나 싶다. 차라리 업무보고 없애고 1월부터 일을 시작했다면 10% 성장이 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대표이사라 그런지 뭐가 다르긴 달랐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으니.

우리 회사의 가장 큰 문제는 업무보고를 받던 현장, 그 회의실에 있었다.

그리고 답은 그들은 모르고 우리만 알고 있는 듯했다.


“네네. 알겠으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알아서 작년처럼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월급이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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