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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필런 Dec 20. 2018

'컵라면'과 '최적'의 눈금

사실은 아직도 길을 찾는 중입니다.

야근을 한다. 야근을 할 때면 종종 컵라면을 먹는다.

업무 시간에 게으름을 피워서 야근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크고 작은 일들로 유난히 골치가 아팠던 날이기에 그저 일찌감치 야근을 예감했었다. 퇴근 시간이 이미 지났음에도 한참 남은 잔업들이 마음의 돌처럼 남아 있다. 이런 날은 저녁을 먹는 일조차 번거롭다.
 
정수기 앞에서 서서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컵라면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아차, 하는 순간 물이 표시된 눈금을 넘으면 그 날은 싱겁고 밍밍한 저녁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물을 덜 넣으면? 짜게 먹어서 좋을 건 없지. 가벼운 잡념들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다 문득, 컵라면의 선을 정확히 맞추려 집중하는 내 모습이 마치 삶을 대하는 ‘요즘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참고로서 표시된 선일뿐인데, 그게 마치 정답인 것 마냥 안에 꼭 나를 맞추려고 애쓰는 삶.
 


 

개성을 죽여라, 키워라, 죽여라


나의 꿈은 건축가였다. 어린 시절 우연히 책에서 본 건축가의 모습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 책에서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역량 중 ‘미적 감각과 개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건축가를 꿈꾼 10대의 나는 다른 과목 공부에 매진하는 와중에도 ‘미적 감각과 개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입 입시라는 큰 산을 목전에 두고 ‘미적 감각과 개성’을 추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국, 영, 수, 소위 ‘메인 과목’의 기세에 치여 미술이나 음악 같은 과목은 잠시 숨 돌리는 여가 시간, 혹은 자율 학습 시간쯤으로 여겨졌다. 어쩌다 진도가 빡빡할 때는 그마저도 국영수의 보충 수업 시간으로 대체되기 일쑤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미적 감각이나 개성은 배부른 소리였다.

결국 채워지지 못한 나의 개성과 호기심, 그리고 이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 내 안에서 조금씩 잊혀져 갔다. 이후 나의 진로도 내가 받은 성적표의 결괏값에 따라 수동적으로 결정되었다. 누군가의 권유와 조언에 따라 ‘문과’를 선택했고, 대학 입학도 그렇게 성적에 맞춰, 유망하다는 업종을 고려해 그렇게 선택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는 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높은 단상에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에게 “개성을 찾으라”라고 말하던 총장의 첫마디. 아직도 기억한다. 무려 12년의 긴 시간을 “개성을 죽이라”는 말을 듣고 산, 그래서 개성이라는 건 어떻게 찾는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제와 개성을 찾으라니. 나의 청소년 시기는 개성을 가진 이 없었고, 또한 어떻게 찾는지 그 방법 또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나를 길들여 놓고 이제와 개성을 찾으라고?

하지만 그도 말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후 나의 대학 생활 4년 또한 그 형태만 조금 달라졌을 뿐 본질은 틀에 맞춰진 전혀 개성 없는 삶, 그뿐이었다.


삶은 참 애꿎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 졸업반이 된 무렵 취업을 준비하며 나는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개성을 어필하세요.” 대학 입학식, 나를 길 잃게 했던 그 말을 다시 만났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스펙을 쌓았는데, 이제 막 스펙을 갖추고 보니 그건 기본이란다. 스펙이라는 기본 위에 ‘나만의 개성과 스토리’를 얹어야 저 문을 통과할 수 있단다. 그렇게 나는 있지도 않은 개성을 억지로 끄집어냈고, 똑같은 틀로 제시된 자기소개서 양식 위에 ‘자소설(自小說)’을 토해냈다.

근 30년간의 삶은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든 틀의 이력서와 한 장의 자기소개서 안에 꼭 맞게 재단된다.
 
 

흔한,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보통사람’, 직장 생활을 하는 나에게 꼭 맞는 이름표다. 물론 이 이름표는 내가 진정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가 가리킨 길을 잘 따라 걸어온 나는 결국 직장인이 되었다. 혹시 직장은 나를 스페셜리스트로 키우지 않을까?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나는 제너럴리스트로 길러지고 있다. 보통의 존재가 되고 있다. 보통이라는 단어의 뜻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흔한 것’을 말한다. 마치 우리네의 삶처럼.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가끔 쓸 데 없는 생각을 한다.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와 같은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이다. 이제와 내가 잘하는 것, 또는 잘하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기껏 생각나는 삶의 고난과 역경이래 봤자,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 봤을 시험, 경쟁, 점수 이런 것뿐이다. 삶에 히스토리가 없으니 사고하는 것 역시도 고만고만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그저 소비하게 된다.
 
 

최적의 눈금


오늘도 당연하게 눈금선에 딱 맞춰 컵라면 물을 부었다. 하지만 오늘은 괜한 치기가 든다. 최적의 맛을 위해서는 4분을 기다리라고 적혀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지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원치 않은 야근에 대한 소심한 화풀이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4분이라는 최적의 기준을 무시한 면발에 ‘너무 덜 익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도 분명 나름의 맛이 있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면이 적당히 잘 익어갔기에 오히려 그간의 컵라면보다 분명 맛있었다.


그동안의 최적은 누구의 최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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