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를 선물 받았다. 부드러운 껍질을 과도로 살살 벗기자 새콤달콤한 향이 퍼지며 샛노란 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입 깨물자 꿀물 같은 즙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몇 년 전 갔던 괌 여행, 그전에 갔던 사이판과 보라카이 여행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자못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여행 못 간 지 한참 되었는데.
이틀 동안 네 알의 망고를 다 해치우고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남국의 태양 같은 과일을 입 안에서 오물거리고 있으면 마치 그곳으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러 가기로 했다.
망고는 비싼 과일이다. 잘못해서 설익은 것을 사고 싶지 않았다.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과일가게에 가서 가장 때깔이 좋은 것을 골라왔다. 그리고 하루에 한 알씩 음미하며 먹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넘도록 나를 위한 고급 과일은 사본 적이 거의 없다. 비싼 설향 딸기를 사면 아이 입에 넣어주기 바빴고, 일가친척 모임에서 과일을 깎을 때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뼈대에 붙은 과육은 내 차지로 돌렸다. 왜 그랬을까, 매일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돈도 벌만큼 벌면서.
당분간 나를 위한 사치를 해보기로 했다. 망고 다음에는 한 송이에 만 오천 원 하는 샤인 머스캣과 여섯 알에 삼만 원하는 복숭아였다. 모두 가장 당도가 높은 것을 골랐다. 샤인 머스캣과 복숭아를 실컷 먹고 난 다음에는 홍시와 귤. 딱히 고급 과일은 아니었지만 생김새가 예쁘고 달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이가 매주 주말에 있는 축구교실에 가는 날이었다. 그 시간은 나의 정기적인 휴식시간으로, 나는 대체로 신간 소설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간식을 먹곤 했다. 평소에 자제하던 커피와 디저트도 이 날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여느 때와 같이 카페 라떼를 한 모금 마신 뒤 케이크를 포크에 찍어 입에 넣었는데, 혀에 닿는 맛이 묘하게 낯설었다. 밀가루와 버터, 설탕에서 느껴지는 인공의 단맛이 잘 익은 과일맛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입을 우물거리며 한 조각을 다 먹긴 했지만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게 맞나?' 의문이 들었다.
얼마 전에 갔던 레스토랑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당근이라면 싫어하는데, 그날 스테이크 요리에 가니쉬로 딸려 나온 당근은 맛이 달랐다. 식감도 부드럽고, 뭔가 편안한 단맛이 났다.
집에 와서 어떻게 하면 그 맛을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요리와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 음식을 뭐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찐 당근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굽거나 볶은 것이 아니라.
일단 당근을 깍둑 썰어서 찜기에 넣고 쪄보기로 했다. 단단한 당근이 익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 익은 당근의 맛은 그 시간을 보상해주고도 남았다. 아무 양념도, 소스도 없었지만 그 자체로 달았다. 레스토랑에서 먹은 것은 약간의 오일과 소금이 가미되었던 것 같았지만, 그것 없이도 삶은 당근 자체로 충분히 맛났다.
혹시나 해서 다음에는 당근과 마늘을 같이 쪄 보았다. 이럴 수가. 마늘이 이런 맛이었던가. 그냥 매운 것, 다른 음식 만들 때 양념으로 쓰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자체로 이렇게 온전한 맛을 내다니. 그런 것들을 맛보고 나자 평소에 그렇게 당기던 맵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들에 대한 욕망이 한 풀 꺾였다.
어느새 내 혀는 '진짜 좋은 맛'을 알아버렸구나. 고급 과일만 먹어서 입이 고급이 된 것일까? 아니다. 원래 자연에서 온 좋은 재료의 맛은 인공의 맛을 훨씬 뛰어넘는다. 값싼 재료를 온갖 색소와 인공 착향료로 버무려 형체를 알 수 없게 만든 가공식품에 비할 바가 아니지.
그럼에도 우리는 왜 여전히 매운 떡볶이나 기름진 감자튀김, 달콤한 생크림빵 같은 음식을 계속 찾게 되는 것일까? 일단 그런 맛에는 중독성이 있다. 내 몸이 사실은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그 자극적인 맛은 이미 내 혀를 길들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그런 음식들이 지천에 널려 있어 너무나 싸게,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식재료를 구해서 상하지 않도록 보관기간을 체크하는 것, 재료를 손질하고 찜기 앞에서 오랜 시간을 참아가며 불 조절을 하는 것은 꽤나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고 신선하고 질좋은 식재료는 생각보다 꽤 비싸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일값 높기로는 세계에서 몇 순위 안에 든다.
하지만 정크푸드는 언제 어디서든 배달어플 클릭 몇 번이면 문 앞까지 배달된다. 옛날처럼 수화기를 들어 낯선 사람에게 집주소를 말하는 수고조차 필요 없다. 바쁜 현대인의 삶에서 간편함은 최고의 미덕이다. 실제로 나는 좋은 식습관을 훈련한 끝에 오랫동안 정크푸드를 먹지 않았는데, 이번 주에 미친 듯이 바빠지자 도저히 쌀을 씻고 요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다지 먹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삼 시 세끼를 빵, 떡볶이나 배달음식으로 때우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소에 좋은 음식들을 쉽게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냉장고에 저장해둘 것을 권한다. 미리 현미로 밥을 지어 냉동실에 얼려두고, 일주일치 샐러드 재료를 손질해서 냉장실 칸칸마다 넣어두면 손 하나 까딱할 시간도, 여력도 없을 때 하는 수 없이 정크푸드를 입에 넣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어느 날의 밤참. 미리 샐러드 거리를 일주일치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 두었더니, 갑자기 배고파서 잠 안 오는 밤에 배달 어플을 누르는 대신 샐러드로 간편히 요기할 수 있었다. ^^
그리고 하나 더, 가급적 양념과 소스를 피해보자. 고기도 양념갈비보다는 생갈비를 택하고, 드레싱도 마요네즈 베이스의 진한 맛보다는 가급적 가벼운 올리브 오일 종류로, 비벼먹지 않고 살짝 찍어먹는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줄여보자. 그럼 우리 입을 중독시켜서, 사실은 좋아하지도 않은 음식을 자꾸 입에 넣게 하는 그 자극적인 맛에서 벗어나 자연으로부터 얻은 진짜 좋은 맛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이어트는 결국 '안 먹거나 덜 먹는 것'이 아니라 '잘 먹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