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몬드에 온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이와 함께 샬럿츠빌로 무빙세일을 받으러 갔다.
1년도 안 되는 단기 거주를 하면서 모든 살림살이를 새것으로 갖추는 것은 너무 돈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인 일이어서, 마찬가지로 단기 거주 후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으로부터 가구와 가전 등 살림살이 일체를 저렴하게 사는 일명 '무빙 세일'을 받는 것이 좋다. 하지만 리치몬드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고, 내가 입주하는 기간은 이사 비수기여서 무빙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나의 전임자도 무빙 세일을 받지 못해서 거주기간 내내 최소한의 도구만 갖추고 캠핑하듯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연수 준비를 하는 동안에 버지니아지역 맘카페에 무빙 세일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바로 답글이 달렸다! 오 놀라워라. 하지만 기뻐한 것도 잠시, 무빙 세일을 받으러 가야 하는 동네는 리치몬드에서부터 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샬럿츠빌. 그리고 5인 가구의 몇 년간 살림이어서 무빙 품목도 너무나 방대했다.
이 무빙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매우 고민하면서 단기 연수 경험이 있는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다가 결국은 포기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일단 리치몬드 지리도 잘 모르는데 거기서 한 시간 떨어진 외곽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저 짐을 다 옮기기 위해서는 한인 이삿짐업체에 맡기거나 유홀이라는 데서 트럭과 인부를 구해야 하는데, 전자는 너무 비쌌고(페어팩스에 업체가 있는데 페어팩스 시내 이사는 600불이면 되지만 리치몬드까지 오려면 1,500불 든다고 한다;;), 후자는 내가 미국에 오자마자 트럭을 예약하고 한국말도 안 통하는 인부와 이사를 하는 고난도의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답글 주신 분께 아무래도 어렵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짐의 일부만 벼룩으로 사 가도 된다고 하셨다. 얏호! 냉큼 그러겠다고 하고, 다른 건 몰라도 밥을 해 먹으려면 밥솥이 당장 필요했기 때문에 리치몬드 온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방문했다. 한적한 일직선 도로를 타고 계속 직진만 하면 되어서 가는 길도 수월했고, 갔더니 주인분이 내가 원래 사려던 것 말고도 샌드위치 메이커, 와플 메이커, 브리타 정수기 등 이것저것 끼워주셔서 알찬 살림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동이었던 건, 나의 애마 CR-V가 뒷좌석을 접으니 짐이 무지막지하게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소형 가전들과 의자 한 개만 려고 했는데, 매물로 나와 있던 이케아 식탁세트가 어쩐지 실릴 것 같아서 시도해 보니 아주 수월하게 들어갔다. 그래서 엉겁결에 그것도 사가지고 왔다. 조립이 어려울까 걱정했더니 주인분 남편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만들어놔서 매우 쉽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직관이 없는 사람도 있다구요. 바로 나 같은... 후훗. 내가 계속 걱정하자 주인분 남편이 매우 조곤조곤한 말투로 분해와 조립과정을 직접 시연하면서 설명해 주셨고, 나는 그 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연습도 조금 해 본 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그 집을 나왔다.
다시 리치몬드 시내로 돌아오는데 차량 계기판을 보니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아아 이를 어쩌지... 아직 미국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법을 공부 못했는데... 게다가 운전하면서 아무리 곁눈질을 해도 한국과 달리 미국 외곽도로에는 주유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기름이 달랑거리는 채로 시내까지 들어가는 모험을 할지 아니면 어딘가 차를 세우고 주유소를 찾아볼지 고민하면서 또 미친 듯이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구글맵에서도 주유소 찾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고, 시도해 보니 바로 나왔다. 다행이다.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찾아들어가 주유기 앞에 차를 세우고 기계 작동을 시작하는데 오잉? 가솔린과 디젤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헷갈리게 넣지 말라고 중고차업체 사장님이 신신당부하셨는데. 잠시 또 미친 듯이 고민하다가 디젤이면 regular 같은 구분은 없을 거 같아 이것이 가솔린이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카드리더기에 체크카드를 꼽고 주유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유를 얼마 할지 정하는 메뉴가 안 나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은 얼마를 주유할지 먼저 정해서 결제한 뒤 주유하는 시스템이지만, 미국은 카드정보를 먼저 보내고 주유를 마친 뒤 결제가 되는 거였다. 메뉴가 안 나와서 우왕좌왕 망설이다가 일단 주유구에 주유기를 꽂고 주유를 시작했는데 언제 멈춰야 할지 몰라서 계속 들고 있었더니 기름이 가득 채워지면서 주유가 멈췄다. 황급히 주유기를 빼니 기름이 꿀렁꿀렁 흘러넘쳤다. 아이고, 아까워라. 하지만 한국에서 리터당 1,800원 넘게 주유하던 거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지. 이 정도는 대차게 쓰자구. 얼른 운전석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시동을 켰더니 별문제 없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아 땀난다.
오는 길에는 Cracker Barrel이라는 식당에 들렀다. 아이가 오리지널 팬케이크 하우스에 다녀온 뒤부터 팬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리치몬드 한인교회 분께 여쭤봐서 추천받은 식당이었다.
구글맵을 찍고 갔더니 건물이 하나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잡화점 밖에 없고 식당이 안 보여서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알고 보니 잡화점 입구로 들어가면 식당이 연결되는 구조였다.
카운터에 서서 안내를 기다리고 있으니 직원이 왔다. 안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한다;;; 기다리라는 건지, 예약을 안 하면 못 들어간다는 건지, 영어가 짧아서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하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 병원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러면 투고(TO GO)해 가겠다고 했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는데 음식이 나오기까지 진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30분 이상은 문 앞에서 서서 기다린 듯하다. 그 사이에 우리보다 뒤에 온 사람들은 차례로 입장했다. 중간에 나보고 '줄 서있는 거예요?'라고 묻는 거 보면 미리 예약한 손님은 아닌 듯했다.
이거 혹시 나만 못 들어가게 한 거 아냐? 인종차별 한 거야? 기분이 살짝 안 좋아지려고 하는데 아이도 옆에서 슬쩍 눈치를 보면서 "엄마, 왜 우리만 못 들어가게 해? 인종차별이야?"라고 물었다. 내 안색이 안 좋은 걸 눈치챘나 보구나.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아이까지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할 필요 없지. 아마도 나에게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투고한다고 했고, 그 투고가 무지막지하게 오래 걸리는 건가 보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 와서 포장을 풀고 병원 예약까지 남은 시간을 재면서 얼른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화가 저절로 풀렸다. ㅋㅋ 그 집 대표메뉴라고 표시된 펜케이크 사이에는 치즈 크림이 끼워져 있었는데 (비록 동맥경화를 부르는 맛이었지만) 다른 가게에서 못 보던 것이었다. 같이 주문한 프라이트 치킨도 맛있었고, 게다가 둘 다 미국 사이즈로 양이 푸짐했다. 다음에는 시간 여유를 두고 가게에 가서 먹어야겠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헬스폼을 받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둔 the little clinic으로 갔다. 그런데 3시에 예약을 했는데 예약내역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임자로부터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두라고 해서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어쩐지 자꾸 예약을 실패해서(놀랄 일은 아니다. 나는 남들이 다 수월하게 하는 홈페이지 예약, 어플 사용에서 혼자만 자주 에러를 낸다;;;), 영어 잘하는 조카에게 전화 예약을 부탁했고, 그 조카가 인터넷으로 예약하라는 답변을 들은 뒤 예약까지 마쳤다고 했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달라고 하니 역시나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인터넷으로만 예약을 하니 지금 바로 스마트폰에 들어가서 내일 날짜로 예약을 하란다. 스마트폰으로 직원이 준 큐알코드를 찍고 링크를 타고 들어가 예약을 시도했으나 예약 가능한 날짜가 없다고 나왔다.
아아... 미국 와서 제일 중요한 일정이 아이 학교 보내는 건데, 아이가 학교를 가야 내가 나머지 정착 과정을 얼른 처리하고 쉴 수 있는데, 미국 클리닉은 미리 예약 안 하면 한참 기다려야 된다는데... ㅠㅠ 암담한 마음으로 여권을 손에 꼭 쥐고 서 있으니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직원에게 말해서 예약을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 직원이 이리저리 다시 시도해 보다가 안 되자 자기가 그냥 예약을 받아주겠다면서 내일 아침 9시까지 오라고 했다. 고마워요 미즈~
여기까지 하고 진이 빠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미국생활은 하루에 하나의 일정 이상을 소화할 수 없다더니만 내가 과욕을 부렸나 보다. 무빙세일받은 짐도 그냥 차 안에 두고 아이와 함께 쉬었다.
[미국 정착 꿀팁]
미국에 가족 모두 함께 온 가정은 거의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지만, 나처럼 엄마와 아이 둘이 온 집은 여행을 자주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므로 너무 살림이 없을 경우에는 삶의 질이 떨어진다. 정착 초반에 가능한 무빙을 받고, 못 받을 경우 새 상품을 사더라도 필요한 물품들은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Good Will, Thrift Shop 등 중고상점들도 많다.
미국 주유소의 주유기는 내가 사용했던 것처럼 아예 디젤이 없는 것도 있다고 한다.
미국 도로에는 주유소와 휴게소가 눈에 띄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주 있다. 경로상 주유소를 검색해서 찾아들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