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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10. 2024

헬스폼과 가스 개설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아침 일찍 일어나 the little clinic으로 갔다. 혹시 조금이라도 늦으면 한없이 기다리게 될까 봐 걱정되서였다. 미국 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간호사가 아이의 신체검사를 시작했다.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력검사를 시작하는데 아이가 잘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처음에 아이가 눈이 보이는데 영어를 못해서 그런 건 줄 알고 저도 모르게 도와주려고 끼어들었다가 간호사로부터 몇 번이나 제지를 당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부터 시력교정을 위해 드림렌즈를 끼고 있었는데, 미국 오기 얼마 전에 한쪽을 잃어버렸다. 병원에 갔더니 남은 하나를 번갈아 양쪽에 끼워도 교정이 잘 되는 거 같다고 해서 새로 안 맞추고 왔는데 혹시 그것 때문일까...


시력검사를 하던 간호사는 아이가 계속 대답을 못하자 검사를 중단하더니 내게 '아이 눈이 너무 나쁘다. 안경을 쓰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순간 시력이 나쁘면 교정 전까지 학교를 못 보낼까 봐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안경을 집에 두고 왔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드림렌즈 끼기 전에 쓰던 안경을 미국에 가지고 오기는 했으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안경을 가지고 와서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럼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싶어 아득해졌다가, 애 눈이 이렇게 나쁜데 지금 미국 학교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한국 가야 되는 거 아니야? 가서 정밀검사받고 치료해야 되는 거 아니야?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간호사의 뒤를 이어 들어온 의사에게 '안경이 집에 있는데 혹시 쓰고 와서 다시 검사를 받아야 되느냐'라고 물었더니 괜찮다는 답변을 들었다. 휴우 다행이다. 일단 문제 하나는 해결되었구나. 의사선생님은 친절하게 농담도 건네면서 아이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귓속에 있는 귀지도 파 주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가는 느낌이 들어서 안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아이의 예방접종기록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받아온 영문 예방접종기록은 아까 건네준 터였다. '이미 당신에게 주었다'라고 했더니 그건 한국에서 받아온 거라서 쓸 수가 없다고, 버지니아 보건소에서 받아온 기록을 내야 한다고 했다. 뭐라고요??? 리틀 클리닉이 그거 해 주는 거 아니었어? 안 그러면 내가 여기에 왜 거의 70불을 내고 와 있는 건데??


여차저차 얘기를 들어보니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헬스폼에는 신체검사결과와 예방접종기록이 모두 필요한데, 리틀클리닉은 신체검사만 하는 모양이었다. 예방접종기록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영문 서류를 확인하고 버지니아 주가 작성한 서류로 바꾸어야 하는데 보건소에 가서 받으란다. 아니 당신도 의사인데 그거 확인해 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보건소를 또 가라는 거야? 그냥 있는 기록 보고 옮겨 적기만 하면 되는데...


헨리코 교육청으로부터 받은 학교 등록 절차


어쨌든 안 해준다는데 별 수 없었다. 클리닉을 나와서 구글맵으로 health department를 찾아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더니, 거기서는 3월 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뭐라고? 지금이 2월 중순인데 그럼 3월까지 학교 못 보내는 거야? 이거 확인해 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 쉬고 싶었지만 그러면 마음이 너무 무거울 거 같아서 다시 다른 health department를 검색한 뒤 다운타운 쪽으로 갔다.


여기서는 초장부터 매우 지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얼리 인 더 모닝... 아이 웬 투 더 리틀 클리닉... 벗...' 하고 길게 하소연을 했더니 지금 처리가 가능한지 확인할 테니 잠시 기다려보라고 했다. 말은 잠시라고 했지만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 담당자가 나와서 리틀 클리닉 의사와 통화해서 하나하나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했다고 하면서 내게 주었다. 오오, 지금 끝난 겁니까? 3월까지 안 기다리고? 너무 감사해서 땡큐를 연발하며 나왔다.


주차장에서 다시 구글맵을 펼치니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리치몬드 가스 워크에서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내친김에 이것도 처리하고 가자. 리치몬드 가스 워크로 말할 것 같으면, 전기를 공급하는 도미니언 에너지가 한국인 통역사를 두고 전화 한 번으로 일사천리 일처리가 진행되는 것과 대조되게, 수차례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고,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 나의 애를 태우던 곳이었다. 아마도 시청 소속이어서 그런가 보다;;; 아파트에서는 입주 전에 가스와 전기 계정을 모두 만들어서 알려달라고 했는데 결국 한국에서는 가스 쪽 일처리가 안 되어 직접 와서 부딪혀보기로 했다.


일단 차를 몰고 리치몬드 가스 워크로 향했다. 주차장이 없다고 듣긴 했지만 이 땅 넓은 미국에서 근처 주차장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주차장이 없었고, '다시 보건소에 가서 차를 세우고 걸어와야 하나' 고민하면서 차로 인근을 빙빙 돌던 차에 바로 근처에 있는 도미니언 에너지 앞 주차장을 발견했다! 역시 도미니언이구만. ㅎㅎㅎ 고마워요. 전기세 안 밀리고 꼬박꼬박 낼게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데, 이번에는 그 사이 잠든 아이가 일어나지를 않는다. ㅠㅠ 어쩐지 오자마자 시차적응을 잘하는 것 같더니 아니었구나. 며칠치 못 잔 잠을 한 번에 몰아 자기라도 하듯이 아이는 깊은 수면에 빠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어쩌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잠시 아이를 차에 두고 다녀오기로 했다. 가스 계정 새로 만드는데 별 거 있겠어? 지금 평일 오전이니 제 아무리 오래 걸리는 미국이라도 한 삼십 분이면 되겠지.


이러한 나의 착각은 가스워크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깨졌다. 한 4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 흔한 번호표도 없이, 누가 먼저 왔는지 자기들끼리 순서를 가늠하면서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업무 창구는 3~4개 정도 있었는데, 한 명의 일처리가 끝나면 담당자가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까지 찾아와서 넥스트! 하고 호명했다.


나는 대기실 한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든 아이가 깨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30분이 넘어가자  점점 불안이 몰려오면서 마음속 기도 소리가 간절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다운타운은 위험하다고 했는데 어쩌지? 주여, 제발 일처리가 빨리 끝나도록, 그 사이에 아이가 깨서 저를 찾아 울거나 무서운 사람이 우리 차로 접근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다시 한번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기다린 지 한 시간이 넘은 때였다. 4명 처리하는데 한 시간이라니, 한국이었으면 너네 다 해고야. 누구에게랄 것 없는 초조와 분노를 마음속으로 삭이면서 담당자에게 '헬로~' 하고 방긋 웃었다. 이제 내 짧은 영어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제발 이 사람이 까다롭게 굴지 않고 빨리 처리해 주기를.


담당자는 이것저것 묻고, 이것저것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런 뒤 나에게 다른 방에 가서 보증금을 납입하고 오라고 했다. What? 그럼 다른 방에 가서 돈 내고 오면 이 긴 줄을 다시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야?? 너네 카드리더기 하나 없니? 식겁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얼른 다른 방에 가서 보증금을 처리했다. 수납담당자가 카드로 계산하면 수수료가 나온다며 뭐라 뭐라 설명했으나 잇츠 오케이. 빨리 해주기나 하셔요. 여기서 익숙하지도 않은 은행계좌 같은 걸 시도했다가 시간 잡아먹으면 안 되지.


돌아와서는 대기실로 가지 않고 내 담당자 창구로 곧장 직행했다. 볼일 보고 있는 앞사람 뒤에 바짝 서서 초조한 얼굴로 그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끝나자마자  바로 내 보증금 납입증명서를 내밀며 '서둘러서 미안하다. 내 아이가 차에서 자고 있다. 너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담당자는 매우 안타까운 얼굴로 저런... 하면서 계속 같은 속도로 업무를 처리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가장 빠른 속도였나 보다.


겨우 가스 개설을 알리는 종이 한 장을 받은 뒤 도미니언 에너지 주차장으로 냅다 달렸다. 우리 차가 눈에 보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아이는 막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얼굴로 나에게 "나 방금 일어났어. 얼마나 잔 거야?" 하고 물었다. 시계를 보니 내가 차를 떠난 뒤 한 시간 반이 넘게 지나있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차에 아이를 두고 내리지 말아야겠다.

가스를 개설하면 이렇게 생긴 종이를 준다 (아랫부분은 개인정보라 생략함).


집에 돌아가서 밥을 해 먹고 한숨 쉬었다.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달렸더니 겨우 오후 2시밖에 되지 않았다. 늘어지게 한숨 잘까 하다가, 정착업무가 완료되지 않아서 계속 마음을 졸이느니 하나라도 빨리 끝내자 싶어 교육청에 연락을 했다. 전화를 계속해도 받지 않아서 그냥 찾아가기로 했다.


교육청 담당자인 티나가 알려준 주소를 찍고 갔더니 한 고등학교가 나왔다. 교육청에서 새 학생을 받는 업무를 하는 웰컴 센터는 그 고등학교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학교 안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전날인 월요일이 조지 워싱턴 생일인 프레지던트 데이라는 휴일이었기에 혹시 오늘까지 연장 휴일인 걸까? 좀 알아보고 올걸 괜히 헛걸음했네.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티나의 메일에 '초인종을 누르라'고 되어있던 것이 기억나 한 번 눌러나 보자 싶었다. 초인종은 특이하게 현관문 옆이 아니라 문 앞에 별도로 세워진 작은 쇠기둥 안에 있었다. 벨을 눌렀더니 누군가 용건을 물었고, '아이를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티나를 찾아왔다'고 했더니 들여보내 주었다.


미리 메일로 영어를 못한다고 알려준 때문인지 티나와의 대화는 수월했다. 무슨 무슨 서류가 필요하다고 말하길래 나는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훗~ 내가 그만한 준비도 없이 왔겠습니까? 티나는 서류를 다 복사한 뒤 아이의 테스트 날짜를 다시 메일로 알려주겠다고, 그날 오라고 했다. 나는 아이를 빨리 학교에 보내고 내 학교로 출근해야 한다고, 늦어지면 아이 혼자 에 있어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고, 티나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런 처지라고, 그래도 최대한 빨리 해 주겠다며 웃었다.


그리고 메일로 통보받은 날짜는 이틀 뒤 목요일. 아아 이제 고지가 보인다. 조금만 더 힘내자.



[미국 정착 꿀팁]  

CVS는 돈이 비싸기는 하지만 신체검사와 예방접종기록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예약도 비교적 빨리 잡힌다. 다음에 다시 한다면 CVS를 가련다.   


리틀 클리닉은 기본적으로 홈페이지에서만 예약을 받고, 전화를 하면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라고 안내한다. 예약할 때 PHYSICAL을 선택해야 하면 되는데, 그러면 예약 가능한 날짜가 안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땐 'NOT FEELING WELL'을 선택하고 몸이 아픈 것처럼 예약한 뒤 가서 신체검사를 해달라고 하면 된다.   


리치몬드 내 보건소는 약 3군데 정도 있는데, 내가 처음 갔던 서쪽 보건소는 학군지 밀집지역에 있는 곳이라 수요가 많아서 일처리가 느리단다. 빨리 처리하고 싶으면 동쪽에 있는 곳을 가면 된다고 한다.    


리치몬드 가스워크를 갈 때에는 인근에 있는 도미니언 에너지 주자창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편하다.    


리치몬드 가스워크는 번호표가 따로 없다. 온 순서대로 업무를 처리하면 된다.   


카드로 보증금을 계산하면 수수료가 꽤 붙는다. 현금수납도 가능한 듯 하다.


학교 등록 관련하여 교육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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