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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Feb 28. 2024

드디어 리치몬드로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둘째 날 아침, 친구가 다니는 워싱턴 성광교회의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은혜로운 찬양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미국생활을 하나님께서 세밀히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오리지널 팬케이크 하우스'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에그 베네딕트과 블루베리 팬케이크, 커피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는데, 아이는 너무 맛있다고 극찬을 하면서 신나게 먹었다. 에그 베네딕트는 몰라도 팬케이크는 엄마가 만든 거랑 별 차이 없는 거 같구먼 뭘. ㅎㅎ 그래도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니 흐뭇했다. 한국에서는 아침을 안 먹어서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너 혹시 미국 체질이니. 아이의 먹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앞으로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거 같은 자신감도 들었다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위안(?)을 얻는 나를 보면서 '내가 지금 많이 불안하구나' 싶어 괜히 짠해지기도 했다.  


다시 아이를 친구 집에 맡기고 중고차매장에 가서 나머지 절차를 완수한 뒤 차를 받아왔다. 이제 내 차가 생겨서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전해서 친구네와 함께 핫플 레스토랑에 가서 밥도 먹고, 쇼핑몰도 구경하고, H마트에서 장도 보고 돌아왔다.


친구가 끓여준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고, 아이가 잠든 뒤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담소로 시작했다가 신앙 얘기로 넘어갔는데 친구와 친구의 교회 사람들의 간증이 내가 겪었던 일들과 너무 비슷해서 놀랐다. 한국에서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는 그런 간증이 넘치는 것을 보니 역시 광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은혜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자려고 눕기 전에 근처 마트에서 산 멜라토닌을 먹었다. 한국에서부터 불면증이 심해지고 있었고 미국 시차 적응도 하기 위해  수면제를 많이 처방받아 왔는데 미국에서는 수면제랑 비슷한 효과인 멜라토닌을 의사의 처방 없이 살 수 있다며, 약보다 그게 낫지 않겠냐고 남편이 권해서였다. 용량도 다양해서 일단 5mg짜리 한 병을 사와서 한 알 먹으니 30분 뒤에 졸음이 몰려왔다.


다음 날. 주일 예배를 마치고 친구네 가족과 헤어져서 리치몬드로 향했다. 이제 정말 아이와 나 단둘이다.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썬팅 안 된 미국차 앞유리로 무지막지한 자외선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두 시간을 달려 렌트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전부 카펫이라기에 신발 신은 미국인들이 막 돌아다녀서 더러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깨끗했다. 입주 인스펙션 할 때 카펫도 전부 물청소해서 말려준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돗자리 깔고 디딜 곳만 디디면서 조심히 살지 말고 그냥 편히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창 밖 뷰가 너무 좋았다. 집 안에서도 숲과 개울이 보이고 새소리가 들렸다. 가끔 베란다에 참새가 날아와 앉기도 했다. 나는 창 밖으로 초록이 보이는 풍경을 너무 사랑하는데 보지도 않고 정한 집에서 이런 전망이라니. 한국에서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집을 보지 못하고 구했었는데, 그 동네에서 가장 전망 좋은 집을 주셨었지. 나를 잘 알고 나의 쓸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면서, 너무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냈다(한국 시간으로 새벽이라 자고 있던 남편은 한참 뒤 일어나 '양평 같다'고 답을 하는 바람에 김이 좀 샜지만. ㅋㅋ).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아이와 함께 한국에서 지고 온 짐을 배낭에 소분해서 아파트 3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날랐다. 늘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보다 무거운 물건을 더 잘 드는 것을 보면서 대견하고 든든했다. 그래, 아들아. 엄마 허리디스크 있는 거 알지? 네가 좀 들으렴. ㅋㅋㅋ


짐을 다 옮기고 배고프다는 아이와 함께 한국에서부터 모셔 온 햇반, 김에 참깨라면을 끓여 먹었다(미국에 신라면, 진라면은 있어도 참깨라면은 없을 거 같아 옷가지는 다 두고 와도 참깨라면은 캐리어 한 켠에 욱여넣었는데 리치몬드 뉴 그랜드마트에 있었다;; 다만 가격은 훨씬 비싸다). 다이소에서 사 온 2,000원짜리 전자레인지용 라면용기가 큰 역할을 했다. 용기에 라면을 담고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완성되는데, 사실 다른 전자레인지용 그릇에 해도 될 거 같긴 하지만 일단은 가볍고, 부피가 크지 않고, 싸서 하나쯤 가져오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배를 채우고 집안을 둘러보다가 세탁기와 건조기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미국 오는 준비과정이 너무 지난해서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전임자가 산 동네, 전임자가 산 아파트로 구했는데 미리 평면도라도 한 번 살펴볼걸... 너무 대충대충 일을 처리한 나 자신이 미워졌다. 고작 열 달 살면서 세탁기랑 건조기를 새로 사야 된단 말인가... 깊은 한숨을 쉬다가 전임자와 친구에게 급하게 연락해서 이 상황을 설명했는데 아파트에서 렌트해 주는 경우도 있다기에 리싱오피스에 메일을 보내 '집 안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없다. 혹시 돈을 따로 내고 빌려야 하면 빌리고 싶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볼일을 보러 돌아다니면서 세탁기와 건조기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떡하니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기뻐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메일함을 확인하니 '원래 렌트비에 포함되어 있어 설치해 주어야 하는데 배송이 늦어져서 미리 못했다. 미안하다.'는 답메일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다행이다. 늦어지면 늦어진다고 알려주면 좋잖아, 이 녀석들아. 하루종일 세탁기와 건조기를 두고 정말 간절히 기도한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이국 땅에서는 모든 것이 기도제목이 된다.


저녁에는 월마트에 나가 생수, 우유, 계란, 시리얼 등 생필품을 사 왔다. 이것도 3층까지 이고 지고 나르려니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파트 맨 위 층이라 층간소음에 시달리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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