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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Jan 08. 2021

선생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인정보다 사랑을 주세요

온라인 코칭 모임에서 인생그래프를 그려보다가, 여태껏 성취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슬픈 기억임을 알아차렸다.


중2 여름방학 때 시에서 주관하는 영어캠프가 열렸다. 각 학교에서 4명의 학생이 참가하게 되어 있는데, 겉으로는 4명의 영어 선생님이 한 명씩 추천하는 모양새를 띠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교 1등부터 4등까지 뽑아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전교 1등이었지만 뽑히지 못했다. 내가 있는 반 담당인 영어 선생님이 나를 추천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성적이 떨어진 줄 알았으나 대신 뽑힌 사람은 전교권에도 들지 못하는 애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육성회장 딸이란다. 영어 선생님은 육성회장 딸을 보내기 위해서 나를 제꼈다.


당시 나는 특목고 준비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탑반이었다. 탑반에 속한 약 십여 명의 아이들 중 학교 대표로 뽑히지 못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학원에서나 보던 친구들을 영어캠프에서 만나는 특별한 상황을 즐거워했고, 각자의 남학교, 여학교를 벗어나 남녀가 한 반에 모여 수업을 듣는 것에 설레어했다. 들어보니 수업도 우리가 매일 받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말 그대로 캠프, 매일매일 다양한 활동이 펼쳐지는 즐거운 곳이었다.


학원에서는 온종일 캠프 얘기뿐이었다. 나는 자연히 소외되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일부러 따돌리는 것이 아닌 걸 알았지만 너무 서러웠다. 그 여름 한 달은 참 길었다.


나는 '압도적인 1등이 되어 다시는 누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당시 나는 시험성적은 1등이었으나 미술실기점수가 워낙 안 좋아서 합산한 기말 성적은 항상 4~5등에 머물렀다. 그래서 나를 제껴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엄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도서관에 갔다. 학원 가기 전까지 종일 공부를 했다. 하다가 지치면 자료열람실에 가서 소설책을 읽었다(지친 나를 감싸주던 그 포근한 공기가 생각난다).


그리고 학원에 가면 또 온통 캠프 얘기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수업만 들었고, 그 서러움으로 다음 날 6시에 일어날 힘을 얻었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도 왜 그러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마 알고 계셨겠지. 묵묵히 도시락을 만들어 건넸다.   


개학한 후 첫 시험에서 만점 가까운 점수를 받았고, 그다음 시험에서도 만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씨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어. 누구에게도 틈을 주지 않겠어. 담임선생님이 놀라던 얼굴이 기억난다.


그리고 영어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불러놓고 한참 있다가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기분 탓이었는지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괜찮아요."라고 하고 돌아왔다.


photo by carli-jeen on unsplash


그래서 내가 기뻤을까? 아니, 나는 슬펐다. 서러웠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일등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받으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공부를 했다.


나는 영어 선생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나는 영어 선생님의 지명으로 2년 동안 영어 부장이 되었고, 영어 선생님은 나를 특별하게 대했다. 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동시에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여러 가지 잡무를 내게 맡겼다. 교무실에서 둘이 이런저런 얘기도 자주 나누었고, 어떤 날은 선생님이 사적인 것을 털어놓아 당황한 적도 있다.


나는 열심히 하면 사랑받을 줄 알고 애써왔는데, 그런 나를 배신하다니. 선생님이 "미안하다."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계속 내가 뭔가 착각하는 게 아닐까, 나 말고 다른 아이가 뽑혀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영어 선생님이 나한테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생각도 종종 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착각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저 슬프고, 또 슬펐다. 갑자기 모든 게 다 허무해졌다. 나는 다시 평소의 생활로 돌아왔고, 영어 선생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늘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 가면 무의식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고 불편하지 않은지 계속 챙긴다. 그런 나를 배려심이 많다고 다들 칭찬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끊임없이 소외당했던 나 자신을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사랑받기 위해 애를 썼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넘치도록 사랑받는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나를 지극정성으로 키우셨는데, 나는 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내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무뚝뚝한 편이었다. '사랑해, 예쁘다'와 같은 애정표현을 할 줄 몰랐다. 기껏 예쁘다고 한다는 말씀이 "아이구, 이 못난이!" 같은 것이었다. 귀엽다는 뜻이었지만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못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다정한 스킨십도 거의 없었다. 내 어릴 적 기억 중 하나가 엄마가 시장에 가면서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동생 손을 잡고 나보고 뒤따라오라고 한 것, 그래서 결국 나는 엄마를 잃어버리고 시장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구슬프게 운 것이었으니, 아마 그 무렵부터 스킨십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안거나 손을 잡을 일이 있으면 나보다 어린 동생을 선택했을 테니. 사람의 살에서 느껴지는 다정한 체온,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 같은 것을 나는 어릴 때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도 내 부모님은 나에게 사랑표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까 나 역시 당연히 아이를 사랑함에도 아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더라.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원하는 다정한 말, 따뜻한 스킨십,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우리는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부모님도 자신의 부모님에게 그런 것들을 받지 못하셨다. 두분 다 가난하고 형제자매 많은 집에서 태어나 부모의 별다른 돌봄을 받지 못했다. 내 부모님의 애정표현은 그저 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더욱 더 사랑표현을 연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내가 원했던 것은 인정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내 아이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주고 싶다.



[참고서적]

그 아이만의 단 한 사람(권영애)


title photo by andrey-zvyagintsev on unsplash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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