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학교도, 학원도 못 가고 집안에 갇힌 지 석 달쯤 되던 어느 날, 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튜브를 보고 싶다며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 그런데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자니 평소에 보던 만화영화가 아니라 덤블링 같은 걸 찾아보고 있더라.
"소망아, 뭐 봐?"
"엄마, 백덤블링 알아? 나 이거 거의 할 줄 아는데 완전히는 못해."
거의 할 줄 안다는 건 뻥 같았지만, 안 그래도 운동신경이 좋아서 옆돌기 같은 건 혼자 터득한 터였다. 백덤블링 배우고 싶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응!" 이런다.
'시키는 엄마 vs. 놀리는 엄마'에서 쓴 대로 영어유치원과 사고력 수학 학원에 밀어 넣었다가 아이를 지치게 하고,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서 쉬게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대로 영영 집에만 있으려고 하면 어쩌지.. 가끔씩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과 싸우는 날들이었는데 오랜만에 아이 스스로 흥미를 보이는 분야를 발견한 것이었다.
당장 이리저리 검색한 끝에, 백덤블링은 '아크로바틱'이라는 체조 종목에 든다는 것과, 마스크를 쓰고 소규모로 수업하는 키즈반 수업이 개설된 학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좋았어! 육아서에서 보니까 자기 효능감을 길러주려면 아이가 잘하는 분야를 찾아주라고, 그게 남들도 흔히 하는 영어나 수학 같은 것 말고 특별한 것일수록 더욱 좋다고 했는데. 바로 체험수업 신청을 했다.
첫날 참석한 수업에서 아이는 놀랄만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오래전부터 하던 친구들보다 훨씬 잘했다. 선생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도 신이 나서 내일도 오고 싶다고 했다. 감격스러웠다. 당장 12회 패키지 수업료를 결제했다.
그런데 네 번쯤 수업을 간 다음부터 아이는 학원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 내내 지켜본 바로는 수업이 어려워지거나 따라잡지 못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언제나 제일 앞에 나가서 시범을 보이는 축에 들었고, 선생님들도 항상 다른 아이들 보고 "소망이처럼 해봐!"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물었다.
"소망아, 왜 가기 싫어?"
"선생님이 무서워. 자꾸 혼내."
히익!! 이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보기에는 맨날 칭찬만 하더구먼. 다른 애들은 동작이 틀려서 계속 다시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이는 대부분의 동작을 바로 따라 할 수 있어서 지적받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수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해버렸다.
"엄마가 계속 봤는데 혼 안 나더구만. 뭐가 무섭다고 그래."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닫았다.
다음 수업이었다. 아이는 가기 전부터 '가기 싫다'라고 노래를 불러댔다. 나는 짜증이 났다. 제가 하고 싶다고 먼저 그래 놓고, 첫날 수업하고 와서 매일 다니고 싶다고 해서 12회 패키지 수업료를 결제해 버렸는데,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나는 매주 차 막히는 서울 시내를 라이딩하느라 진이 빠지는데 말이야. 그래서 조금 엄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등록한 거잖아. 이미 돈을 내 버려서 열두 번은 가야 돼."
아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겨우 나를 따라나섰고, 수업이 끝나고 오는 길에 "그만두려면 몇 번 더 가야 해?"라고 물었다.
그다음 수업이었다. 아이는 가기 전부터 또 자꾸만 "선생님 너무 무서워."라고 말했다. '뭐가 무섭다고 그래?'라고 바로 받아치려다가, 갑자기 예전에 배웠던 감정코칭이 생각났다.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어서 찾아간 상담실의 선생님은 내게 감정코칭을 배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감정코칭이 너무 어려웠다. 온갖 책을 읽고 육아 동영상을 봐서 이론은 꿰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 적용은 잘 되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감정도 들여다본 적이 없는데 하물며 남의 감정을 읽고 공감한다는 것은 내게는 어불성설이었다.
아아, 이건 내게 안 맞아. 결국 던져버렸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시 제대로 해볼 때가 되었어. 아이를 도와야 하잖아.
배운 것을 기억해내며 먼저 아이에게 말했다.
"소망아, 선생님이 무섭구나."
이러면 공감해 준 거 맞나? 그다음엔 뭐라고 해야 하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게. 선생님이 소망이를 혼내는지."
아이는 "똑바로 잘 봐야 돼."라며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 중간중간에도 간간히 내 쪽을 쳐다보는 게 엄마가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아이고, 애 키우기 힘들구먼. 속으로 투덜거리며 선생님을 눈이 빠져라 관찰했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무엇을 무섭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선생님은 수업할 때 표정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만 대상으로 하는 동네 태권도 학원 같은 곳의 선생님들은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관심이 많아 보였는데, 아이가 다니는 아크로바틱 학원은 원래 성인들, 그것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별히 친밀감을 표시하는 일 없이 묵묵히 수업만 했다.
어릴 때부터 대인관계에 민감하고 타인의 표정을 잘 살피는 감정형 인간인 아이는 선생님이 낯설고 서먹해서 약간 위축되어 있었고, (아무리 잘한다고는 하나) 실수할 때 지적받으면 그것을 혼내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아이한테 친절하고 관심 많은 건 아닌데. 아이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다른 애들은 수업 잘만 받는데, 왜 너만 그러는 거야. 답답했다.
그래서 수업을 끝내고 나온 아이가 어땠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보기엔 괜찮은데?"라고 말했다. 아이는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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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감정코칭에 대한 책들을 다시 찾아 읽으며, 내가 왜 감정코칭이 어려운지 분석해 보았다.
제일 큰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내가 내 감정조차 받아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온라인 코칭 모임으로 감정일지를 쓰기 시작한 터라, 이것에 열심히 매달리면서 내 감정을 받아주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내 감정을 보고 수용할수록, 남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쉬워졌다.
그다음 문제는 내가 여전히 아이의 현재에 머물러 주지 못하고 미래를 보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무서워'라고 말할 때, 나는 현재 이 시점에서 무서워하는 아이를 보듬을 마음이 되기보다는, 자꾸만 학원을 그만둔 다음의 미래가 그려졌다.
기껏 잘하는 분야를 찾아냈는데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만두면 자기 효능감은 어떻게 길러지겠어?! 너무 아쉽고, 아까웠다. 이것을 그만두면 아이가 앞으로 영영 잘하는 것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가 싫다고 해도 무조건 시켜서 잘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계속해서 이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아이가 그만둔다는 말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그 마음을 공감해주기는커녕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를 찾아 설득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앞서 내게 감정코칭을 권했던 상담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서 조언을 구했는데, 대답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이 아니라도 기회는 또 온다고. 그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야박한 분이 아니야. 이번 기회에 연연하는 건 내 욕심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른 문제로, 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선생님은 (친절하지는 않을지언정) 아이를 혼내고 있지는 않았다. 아이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꾸만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와 똑같이 느끼지 못하면서 그런 척하기도 싫었다. 그건 감정노동에 불과한 일이 될 뿐이었다.
이것은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누군가 어떤 감정이 들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공감이 가능하다고.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소망아, 소망이가 무섭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엄마가 보기에는 선생님이 혼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소망이는 그렇게 느낄 수 있지. 많이 무서웠겠다."
마지막으로 감정코칭이 어려웠던 이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엄마, 나 무서워."라고 말하면, "그래, 무서웠구나."라고 한 다음에 뭐라고 해야 하지? 가만히 있으면 너무 성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자꾸만 '선생님이 이래서 이런 거야'라고 설명을 한다던가, '그래도 끝까지 해야지'라고 훈계를 늘어놓는다던가, 최악의 경우에는 '끝까지 잘 다니면 장난감 사줄게'라고 타협책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도 상담 선생님께 조언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공감할 때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당신의 마음에 머물러 준다는 느낌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 된다고. 아, 그래. 경청이요. 그것도 내 취약분야인데. 허허허
아이의 말을 잘 경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어떨 때 아이가 관심받지 못한다고 느끼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끔 내가 집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할 때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다가 갑자기 내 노트북 화면을 휙~하고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마다 이게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냐고 야단을 쳤는데, 생각해보니 아이는 엄마가 계속 눈은 노트북 화면을 향하고, 손은 자판을 치면서 건성으로 "응, 응." 하는 게 싫었구나.
아무리 깨달았어도 단숨에 행동이 바뀌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갑자기 '경청해야지'라고 마음 먹는다고 그게 바로 되나.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모든 일은 '훈련'을 통해 가능했다. 나 자신을 다시 세밀히 관찰한 결과, 아이가 부를 때 손을 멈출 수만 있다면 하던 일을 중단하고 아이에게 집중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뒤에는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깍지 끼기(멈추기만 하면 곧 다시 움직이므로) → 아이에게 눈 맞추기 → "응?"하고 부르며 미소 짓기'의 삼단계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실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지만, 아이의 말에 집중해서 경청하는 횟수가 예전보다 훨씬 늘었다.
그래서 아이의 아크로바틱 학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아이에게
"소망아, 많이 무섭고 불편하구나. 그럴 수 있어. 소망이가 싫으면 그만두어도 돼. 하지만 소망이가 처음에 자주 가고 싶다고 해서 12회 수업료를 한 번에 냈으니 그것까지만 끝내는 게 어떨까? 힘든 걸 꾹 참고 다니는 것에 도전해보자. 12회를 마치는 날 집에 친구를 초대해서 축하해줄게."라고 말했다.
아이는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12회를 끝까지 다닌 다음 그만두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재밌었는지 다시 다니고 싶다고 나를 조른다. 선생님도 보고 싶다고 하고. 아마도 무서운 감정을 공감받고, 무조건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지니까 마음이 편해져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