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준비는 이미 다 해놓은 터다. 남편은 입맛이 까다롭지 않고, 매일 똑같은 것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식사 준비는 퍽 수월하다.
그렇긴 해도 우린 맞벌이인데 나 혼자 가족의 식사를 도맡는 게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지만 뭐... 어디 갈 때 운전은 거의 남편이 담당하니까, 무거운 물건도 남편이 주로 드니까 셈셈이라고 치자. 결혼 전에는 꽤 성평등 의식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살면 살수록 적어도 가족 간에는 소통과 배려가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남편의 퇴근부터 30분간은 온전히 남편에게 집중하는 시간. 아이와 나는 진즉에 식사를 끝냈지만, 남편의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 오늘은 어떻게 지냈는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한다.
식사가 끝난 남편은 소파로 이동해서 이내 길게 드러누웠다. 나는 식탁 정리나 설거지, 아이를 챙기는 일마저 미루고 그 옆에 찰싹 붙어 앉아 또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마치 남편을 충전하는 것처럼.
워킹맘이라는 이유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정엄마한테 맡기다시피 했다가 다섯 살 무렵 육아휴직을 하고 처음으로 내 손으로 키우기 시작했을 때, 고작 다섯 살인 아이는 매일 같이 11시가 넘어야 잠이 들었다. 귀가시간이 늦은 아빠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이고, 아이를 씻기고,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8시 반에 자리에 눕히면 어김없이 남편은 "소망아, 아빠랑 놀자!" 하며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고, 아이는 이부자리에서 총알처럼 튕겨나갔다. 그때부터 다시 두 시간은 기본으로 지나가고, 거의 11시가 다 되어 나의 버럭! 하는 소리가 들려야 아이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니 아이와 나의 관계가 좋을 수도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인 생활습관을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것도 모르고! 왜 나 혼자 이렇게 애써야 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 훼방을 놓는 거야?'
차라리 남편이 취미다, 친구다 하며 바깥으로 도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가정이 제일 중요한 남편은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집으로 와서 밥을 먹고, 아이 얼굴을 보아야 잠이 들었다.
불만에 가득 찬 나를 보고 가끔 남편이 외롭다는 마음을 비추기도 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조금 있다가 식구들이 다 자러 들어간다고, 그럼 자기 혼자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외로울 틈이 있는 남편에게 더 화가 났다. 나는 온갖 역할들에 짓눌려 질식할 것 같은 나날들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 역할들은 누가 나에게 짐 지웠다기보다 내가 눈치 보며 떠안은 것들이 더 많았는데.
아이가 커가도 생활습관은 여전히 자리 잡히지 않았고,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그것이 곧 학업부진으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 때문에 학교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되자 가정교육이 더욱 절실해졌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데, 어떡하지? 여전히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퇴근하는 남편은, 여전히 밤늦게까지 아이와 놀고 싶어 하는데.
그 무렵 읽었던 책에서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보았다. 읭?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무렵 만났던 육아 코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밍이님, 남편에게 잘해주시면 남편이 먼저 협조할 거예요.' 내가 왜 아이 잘 키우자고 남편까지 돌봐야 하는데! 그럼 나는 누가 돌봐주는데!
하지만 뭐... 달리 방법이 없잖아.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나 자신은 짬짬이 내가 돌보기로 하고 일단 남편에게 잘해주자.
그제야 남편이 외롭다는 말이 떠올랐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는데 마누라도 자식도 데면데면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돌아오면 무조건 모든 일을 뒤로하고 남편 옆에 30분은 붙어있자구(물론 나도 힘들게 일하면서 애도 보고 집안일도 하지만, 그 셈은 나중에 치르기로 하지).
예전에는 남편이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준 뒤 잘 때까지 거의 대화가 없었다. 아이랑 붙어 있느라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나도 좀 쉬는 시간을 가져야 했기에.
나에게 쉼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옆에 붙어 있으면 끊임없이 뒤치다꺼리를 할 일이 생기므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가끔 남편이 볼멘소리로 '너는 내가 오면 밥만 달랑 주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라고 말할 때마다 의아했다. '내가 여태 봤으니 이제 당신 차례 아니야?' 나는 남편을 마치 야간의 편의점 알바 교대조 정도로 대해왔구나.
남편과 찰싹 붙어 있는 30분의 시간은 마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아이랑 놀고 싶다고 타령을 하면서 두 시간은 재우지도 않고, 나의 불만에 찬 얼굴도 무시하더니, 30분을 달라붙어 놀았더니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면서 은근슬쩍 피곤해하네. 아이를 재우겠다고 데리고 들어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아하, 당신은 그저 외로웠던 거구나. 나는 남편에게 고작 하루 삼십 분도 내어주지 못할 만큼 각박했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 '그럼 나는? 내가 원하는 건?'이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이건 잠시 뒤로 하고 먼저 남편에게 시간을, 마음을 내어주자. 이것이 선순환을 일으켜 나에게 돌아올 거야.
설령 돌아오지 않으면 어때. 내가 내 남편에게 그 정도의 선물도 못해주겠어. 그리고 나는 확실히 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 노력의 열 배, 백 배로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