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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19. 2021

아이의 고민을 대신 해주게 되면

자기주도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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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에 쓴 것처럼(아이와 집안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 갔다 오면 먼저 숙제부터 하고 놀았다. 그 습관은 나를 고3까지 줄곧 모범생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내 아이도 그러면 참 좋으련만! 아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일찍 숙제를 시킬 수가 없었다. 언제나 최대한 뒤로 미루려 들었다.


숙제를 안 하고 재울 수는 없으니 자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그러고 나면 아침에 졸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헤롱거리다가 결국 나에게 혼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어쩔 줄을 모르겠으면 일단 관찰하라'는 것이 그간 아이를 키우면서 알게 된 나름대로의 깨달음이었기에,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는 것을 중지하고 아이를 살펴보았다.


에너지가 많은 아이는 낮 시간 동안 충분히 몸을 사용해서 놀고 난 뒤에야 차분히 책상 앞에 앉을 마음이 드는 듯 했다. 낮부터 억지로 앉혀 놓으면 글씨쓰기 숙제 한 바닥을 가지고도 한 시간을 버티는데, 낮에 종일 놀고 자기 전에 시키면 오 분만에 해치웠다.


그래, 학교 끝나자마자 숙제 시키는 것은 포기하자. 숙제의 시작시간을 '저녁 먹고 10분 뒤'로 잡았다. 이제는 끝내는 시간이 문제였다. 여태 돈도, 시간도 무한한 것처럼 살아온 아이에게 '빨리 해, 어서 해'라는 다그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이의 큰 즐거움은 남편이 퇴근한 뒤 남편의 휴대폰으로 하는 게임 20분인 것에 착안해서, '아빠의 퇴근시간인 8시 반까지 숙제를 마치면 게임시간을 20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말에 아이는 갸우뚱했다. 왜 그래야 해?


먼저 아이에게 수면에 관한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왜 잠을 일찍, 충분히 자야 하는지. 그리고 나서 얘기했다. 적어도 10시에는 잠자리에 드는 게 좋대. 그러려면 8시 반 전에는 숙제를 마쳐야 그 다음 목욕도 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할 수 있겠지?


납득한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부터 '8시 반까지 숙제, 10시에 불끄기'라는 우리집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규율이라고는 없던 집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photo by annie-spratt on unsplash


처음에는 잘 되어가는 듯 싶었다. 아이는 현관 근처에서 아빠의 발소리가 나는지 때때로 귀를 기울이며 얼른 숙제를 마쳤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시 나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숙제 안하니? 10분 남았다. 5분 남았어. 얼른 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럼 또 공부정서가 망가질 텐데. 나는 왜 다시 잔소리를 하고 있나? 가만히 살펴보니 '아이의 걱정을 내가 대신 해주고 있어서'더라.


8시 반까지 숙제를 끝내면 게임을 할 수 있다, 그 말은 그 때까지 숙제를 못하면 게임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아이가 미션에 실패해서 게임을 못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왜?


먼저, 아이가 패감을 가지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난 안 돼. 난 못하겠어. 난 실패했어.'라는 생각을 가질까봐 겁이 났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영어유치원이니 사고력 수학학원을 들이밀고, 그것도 모자라 숙제 안 한다고 화를 내면서 아이의 자신감을 꺾었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실 더 큰 이유는, 아이와의 갈등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8시 반을 넘긴 아이가 울고 불고 "게임하게 해 줘."라고 떼쓰면 "안 돼. 규칙은 규칙이야."라고 단호하게 자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화를 내고 결국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봐 겁났다.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전혀 연관관계가 없는데도, 왜때문인지 여태까지 나는 항상 그 둘이 세트라고 생각했다. 화내기 싫어서 단호하게 대해야 할 순간까지 물렁해졌다.


아이가 시간을 지키지 못할까봐 내가 걱정을 대신 해 주고 있으니, 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알아서 10분 전, 5분 전 다 말해주니까. 실패할까봐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미리 알아서 상황을 세팅해주는 데 고민할 게 무어야. 이런 게 헬리콥터맘이로구나.


이래서야 시간을 정하는 의미가 없었다. 아이가 스스로 시계를 보고 남은 시간을 계산하면서 자기조절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인데. 나도 아이 숙제에 매여서 질질 끄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서로 행복한 정서적 교감을 충분히 누리고 싶은데.




고민만 하던 어느 날, 그 날따라 몸이 매우 피로했다.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숙제하라고 다그치지도 못하고 있다가 8시 반을 넘겼다. 아이는 시계를 본 뒤 얼른 남은 숙제를 끝내고 내게 물었다. "엄마, 게임해도 돼?"


"시간을 넘겨서 안 되겠어." 화를 낼 기운도, 설득할 기운도 없었다. 그냥 담담하게 안 된다고 했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달랠 힘도, 허락할까말까 고민할 여력도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그냥 안 된다는 말만 하고 내버려두었다. 그 순간 내가 여태 떠맡고 있던 아이의 고민이, 그 일의 책임이 아이에게로 옮겨갔다.


다음 날 숙제시간, 내가 말하기도 전해 아이가 먼저 시계를 보고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오늘은 얼른 숙제하고 많이 놀아야지." 하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상 앞에 앉았다.


신기해라. 내가 아이의 걱정을 대신 해주기를 멈추자,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 그 기회를 빼앗고 있었구나. 네가 혼자서 성장할 기회를.


가끔 보면 매사 열의에 찬 엄마들이 있다. 나도 그랬다. 유노윤호한 열정으로 모든 일을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아이를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그 열정이 독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더라. 부지런히 애를 쓰면서 부지런히 아이를 망치는 경우를 훨씬 많이 보았다.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그리고 아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전부인 것 같다.


그리고 덧붙이면, 우리는 아이를 키우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뒤늦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실수에 매이면 이어서 더 큰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과거에 준비되지도 않은 아이를 온갖 사교육에 밀어넣었다가 아이의 자존감을 꺾고 실패를 내면화하게 한 나의 실수는 뼈아픈 것이었지만, 언제까지나 미안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봄으로써 훈육이 필요한 순간에 내버려두는 것은 더욱 아이를 망치는 길이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그리고 완벽해지려고 아무리 애를 써봤자 아이는 어쨌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부족한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 아이와 함께 큰다는 마음으로 겸손해지는 것, 그저 아이의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은 이미 충분히 훌륭한 엄마이다.     



[참고서적]

미라클 베드타임(김연수)

이너 게임(티머시 골웨이)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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