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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07. 2021

숙제와의 전쟁

공부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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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끝에 몇 가지 기준을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매일 8시 반 전에 숙제를 마치면, 게임 시간 20분 주기'였다.


숙제에 관해서라면, 참 할 말이 많았다. 아이가 영어유치원을 다니던 일곱 살 때, 매일 밤 숙제로 씨름을 했다. '내가 보기엔 꼴랑 몇 장 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아이는 하기 싫다며 울고 불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나의 불호령을 들어야만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데 불성실해서 안 한다'라고 생각하고 화를 냈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집 애들은 p*a다 게*트다 하는 빡센 학원도 잘만 다니는데, 너는 돈 쳐들여 영어유치원 다니면서 이 정도도 못하니'라는 실망감이 깔려 있었다.


사실 그 '다른 집 애들'이라는 건 '엄마 친구 아들'처럼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물론 어릴 때부터 학업적으로 뛰어난 아이들이 분명 있고, 그 아이들은 아무리 빡센 학원 커리큘럼에도 잘 적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수의 아이들은 매일 영어유치원을 잘 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진짜 제대로 배우고 흡수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강남 학군지에서 몇 년씩 학원을 다닌 아이들 중에서는 실력에 맞지 않게 진도만 빼는 바람에 오히려 지방 중소도시 아이들보다 영어는 더 못하면서 영어 거부감과 열패감만 생기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엄마 눈치를 보느라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유치원에 등원한 우리 아이도 남들 눈에는 '잘 적응하는 남의 집 자식'으로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https://images.app.goo.gl/Nkix4PU93yjRr1kw8


'시키는 엄마 vs. 놀리는 엄마'에서 쓴 것처럼, 코로나가 터지고 한동안 아이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실컷 놀렸다. 그러다가 학업부진이 걱정이 되어 학습지를 신청했다. 일대일 수업이니 마스크를 쓰고 하면 감염 위험이 적을 것 같아서였다.


아이의 실력 점검 차 관리자급의 선생님이 오셨을 때 나는 "소망이는 공부를 그닥 좋아하지 않고 숙제도 성실하게 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내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다시 숙제를 시키느라 울고 불고 전쟁을 치르기는 싫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이와 시험수업을 한 뒤 나를 부르고 이런저런 것을 설명하면서 끝에 하신 말씀이 충격이었다. "어머님, 소망이는 불성실한 아이가 아니에요.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내가 '꼴랑 몇 장 되지도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이한테는 '꼴랑 몇 장'이 아니었던 걸까. 나름대로 힘들어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걸 엄마가 알아주지도 않고, 너는 왜 성실하지 않냐고 불호령을 내렸으니 얼마나 힘들고 서러웠을까.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아이가 왜 숙제를 힘들어했는지 관찰해보았다. 소근육 발달이 늦은 아이는 글씨 쓰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는데 숙제는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쓰는 양이 제법 되었다. 아이는 영어를 귀로 듣고 기억한 다음 복기하는 능력이 좋은 반면 문자를 읽는 것은 싫어했다. 그러니 정확한 철자를 익히지 못해서 문제를 풀면 자꾸 틀렸고, 틀리니 더 하기 싫어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영어로 된 책을 읽는 것, 문장을 쓰는 것보다는 영어 자체에 흥미를 가지게 해 주는 것이 좋겠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피킹을 많이 할 수 있는 학원에 보내면 흥미가 더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적당한 학원을 골라 보냈다. 쓰는 숙제가 일절 없는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어는 해결되었지만 국어가 문제였다. 책 읽기를 즐기지 않는데 문해력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일곱 살 때 매일 저녁 숙제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공부 정서는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다.


공부는 정서가 전부라던데. 이미 망한 정서를 어떻게 되돌리지? 여기서 뭔가를 억지로 시키면 더 나빠질 거고, 그렇다고 손을 놓아도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문제인데.


나는 의외의 곳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나 자신의 자기 계발을 위해 참석했던 온라인 코칭 모임의 필독서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을 읽고 나서 스몰 스텝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먼저 내 삶에 적용해 보니 그 효과가 대단했다. 늘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는 못하던 몇 가지 일들에 시도하면서 '모든 일은 잘게 쪼개면 부담스럽지 않은 단위가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야!


그 날부터 아이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단위가 어떤 것인지 테스트했다. 문해력을 높이는데 낭독이 좋다길래 아이에게 책을 읽게 시키면서 한 번에 얼마나 읽으면 '싫다 소리 안 하고 그냥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그만큼으로 숙제를 줄였다.


쉬운 성취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8세 아이에게 무려 '우리 아이 첫 그림책' 같은, 꼬꼬마들에게 읽어주는 책을 빌려서 읽히고 독서록에 기록하게 했다. 글씨쓰기 연습도 처음에는 몇 단어로 시작했고, 그림일기는 한 줄만 쓰게 했다. 숙제하는 시간은 모두 합쳐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 하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분량과 난이도가 조정되니까 아이는 점차 숙제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숙제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쳤는데. 책상 앞에 앉는 것을 도살장 끌려가는 것처럼 여겼는데.


이제 문제는 시간이었다.



[참고서적]

공부는 감정이다(노규식)

아주 작은 습관의 힘(제임스 클리어)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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