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내게 정해져 있었던 하나의 삶의 순리 같은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더러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항상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다. 매번 나의 끝은 버려짐이었고 나는 그런 관계가 더 이상 지겨워졌다. 마음을 열고 다가갔다는 데이기 일쑤라 더 이상 헤어지는 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지쳐가고 있었다. 걸어 잠근 감정 틈 사이로 내게 보내는 알량한 동정 어린 시선조차 보기 싫어 외면했다.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했다. 그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는 익숙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으니까. 나는 먹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식욕이 감퇴했고 점점 더 야위어 갔지만 차라리 이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깥의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내 관심이 식어갈 때쯤 그를 만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외형적으로. 그래서 그와의 첫 만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다리 한쪽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 내게도 찾아와 무심하게 말을 건네고 건네받지 못한 대답에도 익숙한 듯 돌아섰으며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을 하며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그날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발걸음을 하고 찾아왔다. 그가 왜 불편한 걸음을 걸으며 자원봉사를 신청하면서까지 이곳을 오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곤 놀라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내가 알 게 뭐람.
그 순간 그의 의족이 돌부리에 걸려 걸음걸이가 인사불성이 되더니 기어코 자빠지고 말았다. 아뿔싸. 왜 하필이면 진흙탕이냐고! 나는 진흙탕 근처에 있던 죄로 진흙의 물을 사정없이 받아내고 말았다. 그는 떨어진 안경은 잊어버린 듯 진흙 묻은 손으로 간신히 일어나더니 내 몸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려 애썼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닦는 게 아니라 더 묻히고 있다는 게 정확하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 진지한 그의 행동 앞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안경을 낀 그 너머로 한껏 반짝이며 나를 담아낸 그 눈과 크게 웃는 입과 달리 작은 보조개. 안경을 찾아 끼고선 다시 나를 보더니 알 수 없는 웃음과 연신 뱉은 미안하다는 말.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 나는 그의 그런 모습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를 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게 더 맞았다. 그렇게 나는 그와 그 사건 이후로도 데면데면하게 인사를 받는 사이에서 그의 품에 안기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날은 서로의 온기가 전하는 말들로 모든 것을 대신한 날이었다.
그와의 동거는 꽤 즐거웠다. 그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시간만 되면 그는 자신과 산책을 하자고 부추겼다. 그와 걷는 길은 말이 없어도 충분했다. 우리는 그저 함께 발을 맞춰 걸으며 자연이 내는 소리와 부자연스러운 소리의 섞임 사이에서도 더 괜찮은 소리를 찾아냈으니까.
그의 엉성했던 발걸음은 나와의 산책 이후로 조금씩 땅을 딛는 힘이 단단해졌다.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던 그의 지지대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매일 똑같은 길의 울창했던 나무의 잎은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다 이내 떨어지기 시작했고 온종일 볕을 쬐고 떨어진 잎들은 우리 발 앞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흩어져 갔다.
나는 늘 생각했다. 내가 버려져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 내가 가진 게 없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그를 통해 알았다. 나를 스쳐 지나간 이들은 그저 책임을 다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도 한여름처럼 땀을 흘린다. 내가 멈춰 있는 줄도 모르고 그는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인다. 그가 내가 멈춘 걸 알았는지 몇 걸음의 뜀박질 끝에 나를 돌아본다. 여전히 그의 안경 너머 말간 눈엔 내가 있고 크게 웃는 입과 달리 작은 보조개가 보인다. 그는 멈춰 서 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나는 그를 향해 달린다. 어느새 가까워진 발걸음 앞에 그가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이제 우리 둘이 내는 자연스러운 발소리를 한껏 느끼며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길을 향해 또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