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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을 가꾸는 건축가 Jun 18. 2021

석바위, 불란서주택

불란서 주택

불란서 주택     


B 씨는 1978년에 인천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인천 남구 주안4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천 남구(2018년 남구에서 미추홀 구로 바뀌었다.) 주안동에는 ‘석바위 사거리’라는 지명이 가장 유명하고, 그곳의 중심에 ‘석바위시장’이 있다. 석바위는 이곳 일대가 석암리(石巖里) 또는 석촌(石村)으로 불리었던 것의 현재 명칭으로 ‘석바위’는 석암리의 돌 석(石)의 소리와 바위 암(巖) 뜻 글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석바위 사거리는 그에게 세상의 가장 핫한 중심지였다고 한다. 큰 시장도 있고, 극장, 은행, 큰 상점들이 대로변에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쇠락한 구도심의 일부가 되었다. 주안동은 석바위 뒷산이 주안산(보통 만월산이라고 부른다.)이고 산의 흙색이 붉고 기러기가 앉은 것 같은 형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B의 집은 석바위 사거리에서 걸어서 남쪽으로 10분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다. 석바위사거리에 위치한 석바위 시장까지 걸어 다니는 도보권에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석바위 시장에 장을 보러 걸어가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아주 어릴 적 사진에는 집 앞에 길이 비포장도로였던 모습이 있고, 그의 기억에는 차가 없는 6차선의 아스팔트 깔린 대로를 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타서 다녔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집은 북쪽으로 2차선 도로가 있고, 남쪽으로는 인천고등학교가 붙어 있었다.


집 앞에서 가족사진     

사진을 보면 2차선의 도로가 아스팔트 없이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언제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되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집 앞 도로를 점령하고 대가족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차가 다니지 않는 한가한 곳이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B가 태어나기 전으로 어머니 배속에 그가 있을 때로 1978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의 가족들과 뒤로 누군지 알 수 없는 동네 꼬마도 보인다. 아마 사진 찍는 것이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가족사진 뒤편으로 흥일 부동산 간판이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셨던 부동산이다. 부동산이면서 뒤쪽 가족들 사이로 과일, 음료수 박스 등이 보이는데, 슈퍼를 같이 운영하셔서 그랬다. 당시 부동산은 복덕방으로 동네 사정을 잘 아는 어른이 운영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친구를 상당히 좋아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부동산을 하셨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뒤쪽으로 집의 라인이 매우 모던하게 뻗어 있다. 옥상에 굴뚝도 보이고, 옥상 무늬 난간석과 창살의 전통 문양들이 당시 집들의 일반적인 장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속 집은 ‘경사지붕이 없는 불란서 주택의 변형된 1층 단독주택, 양옥’이다. 1개 층의 작은 단독주택으로 사진에서 보이는 면이 북쪽 길가 변으로 점포가 있고, 그 반대편 남쪽에는 마당이 위치하여 있는 작은 주택이다.               


80년대의 셰어하우스   

  

이 집에는 B 씨의 가족이 살았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가족들이 살았다. 그의 가족은 거실, 안방, 부엌, 지하실을 썼고, 두 번째 가족은 대문에서 가까운 문간방으로 불리는 집으로 부엌이 딸린 방 하나를 썼고, 세 번째 가족은 대문에서 가장 먼 뒷방으로 방 하나와 부엌이 붙어있는 공간을 썼고, 네 번째 가족은 도로에 면한 점포 방을 썼다. 작은 점포와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은 제대로 된 부엌이 없는데, 점포 한편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다고 한다. B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점포에서 부동산 슈퍼, 문방구를 하셨다고 하는데, 그에게 실제 기억은 없다고 한다. 이 점포가 가족들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을 것이다. 서울로 이사 가셔서 비어있는 점포 방은 이 집의 네 번째 가족의 보금자리였다.

1층 평면도(위), 지하층 평면도(아래)

이 당시의 주택 평면도를 잘 보고 있으면, 지금의 ‘셰어하우스’ 같기도 하고, 가족의 수에 따라서 변신이 자유롭게 가능한 ‘리모델링 가능 평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각 방들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를 한 가구가 사용할 수도 있을 정도로 합체와 분리가 자유로운 평면이었다. 분리가 가능했던 것은 각 방마다 연탄아궁이가 위치한 부엌과 욕실을 중첩 사용하는 다용도 공간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 계획할 때부터 가구 분리를 전제로 건축한 것이다. 가구 분리의 인식은 첫 번째 소개한 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집은 최대 4가구가 살 수도 있는 변신의 귀재이기도 했다. 이 당시 주택부족의 시대적 단면과 주인은 좁게 살면서 세를 놓아 부수입을 얻는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운 시절에 온 가족이 하나의 방에서 살고, 마당을 공유하며 삶을 영위하는 형태이다. 이 형태는 80년대 시대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주택의 유형이었다. 이후 1999년 이 유형은 법적으로 ‘다가구주택’이라는 형태로 변경된다.

평면을 살펴보면 거실을 중심으로 4개의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 이 거실은 분리 합체의 중심으로 바닥난방이 되지 않았다. 바닥은 나무마루로 되어 있어 대청마루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변형된 마루의 형태이다. 나머지 방들은 각각 연탄 온돌난방이었다고 한다.

이 주택의 공용공간은 마당과 외부 화장실이다. 각자의 집은 작지만, 마당이 전체 집의 절반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니, 이만큼 좋은 공용공간도 없을 것이다. 넓은 마당을 같이 공유하는 주택으로 실제 방하나의 면적은 작으나, 필요에 따라서 마당을 같이 쓸 수 있으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지하실과 화장실     


부엌에 위치한 계단으로 내려가면 거실의 하부에 본채의 보일러실, 연탄창고, 욕실이 있다. 본채의 거실과 부엌이 단 차이 없는 수평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프로판가스통으로 가스 취사를 하고 있었고, 연탄난방은 지하로 내려보내어 LDK 통합의 현대적 평면의 바로 전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는 여닫이 문이 달려 있었다. 다른 가구들은 단 차이가 있는 연탄난방과 연탄 취사, 욕실을 겸용하는 평면이었다.

지하에 있던 연탄보일러는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일체식 연탄보일러 장비가 아닌, 아궁이는 벽돌로 쌓여 있었고, 물을 데우는 곳은 아궁이 뚜껑에 물순환장치가 달려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연탄보일러의 초기적 형태였을 것이다. 외부에는 창고(광)와 욕실 및 다용도실이 있었고, 재래식 화장실이 1개소 있었다. 화장실은 4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재래식 화장실의 가장 불편한 점은 밤에 화장실에 갈 때였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방에 요강을 두고 볼일을 해결하기도 했었지만, 부득이하게 화장실에 가야 할 때는 혼자 가지 못하고, 누군가가 같이 따라가지 않으면 무서워서 가지 못할 정도였다.    

1층 단독주택으로 평지붕에 난간이 있다. 이 당시 많은 주택들이 삼각 박공지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집은 웬일인지 없다. 박공지붕을 건설하는 비용을 절감하여 저렴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기술이 좋아져서 평지붕에 방수를 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림의 가운데를 보면 부엌 한쪽에 지하실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B의 기억 속에 지하실이 상당히 무서웠다고 한다. 지하실 내려가는 곳은 나무 합판이 수평으로 미닫이 뚜껑처럼 계단을 덮고 있었다. 나무합판 뚜껑을 한쪽으로 밀면 레일에 얹어져 있어, 한쪽으로 밀리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항상 어둡고 누군가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위협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옛날 집이었으니, 지하실이 방수가 잘 안되어 항상 습기가 가득한 곳이었고, 여름에 비만 오면 지하실에 있는 물을 퍼내기 바빴다고 한다. 마당과 도로의 단 차이가 있는데 도로가 더 높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B의 기억에는 약 60cm 정도 차이가 있었다. 아마 집이 더 낮지는 않았을 텐데, 비포장도로에서 도로가 점점 포장되면서 높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마당에서     


마당의 창고 건물을 이용해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70년대의 주택의 대부분이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다. 창고 건물이나, 대문의 지붕을 이용해서 옥상이나 2층으로 올라가는 형상이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어릴 적 공포의 기억이 있다. 어릴 때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사람이 있다고 착각해서 너무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아님, 진짜 사람이었는지도.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동네에 옥상을 넘어 다니는 괴생명체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마당에는 은행나무가 2그루 있었다. 그곳에 살 동안 은행나무는 열매를 열리지 않았는데, 그곳을 이사하고 나중에 가보니 은행이 엄청나게 열리는 나무가 되어 있었다.     


집은 사라졌다.     


지금 이 집은 4층으로 바뀌어져 있다. 도심 한가운데이면서 15미터 도로에 접한 필지에 1층 집이 남아 있을 리 없다. 1층에는 상가가 2~4층은 주택이 있는 전형적인 4층 상가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원래 집은 1층으로 1개의 점포와 세 가구가 살 수 있는 수평 평면의 집이었다면, 신축된 집은 1층 상가와 2-4층에 각각 집들이 사는 수직적 평면 구성의 집으로 바뀌었다. 지금 시대에 4층짜리 상가주택은 너무나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시대별로 당연시되는 건축의 유형이 있는 것처럼, 수평적 1층 집은 70-80년대의 전형적인 주택 유형이고, 4층 상가주택은 또한 지금 시대의 전형적인 주택의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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