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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Oct 30. 2019

딸바보 아빠가 가져온 것들


사거리 지나고 있음. 5분 안에 도착.


엄마에카톡이 왔다. 출발한다는 메시지가 온 게 아홉 시인데 한  넘어서야 우리 동네에 들어왔다. 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아파트 앞으로 나갔다. 저 멀리 아빠 차가 보였다.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외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멀리사는 딸인 탓에 6개월 만에 만나는 부모님이다. 그새 주름이 더 깊어졌다. 이젠 누가 봐도 할머니, 할아버지다.


- 우리  잘 있었어?


여기서 기는 (민망하지만) 나다. 아빠는 두 손자보다 내가 먼저 보이나 보다. 하여간 서른 넘은 아줌마를 아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우리 아빠밖에 없을 거다.


- 아, 무슨 기야.


나는 까칠하게 대답했다. 허허허. 아빠가 웃는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다. 짐으테트리스라도 했는지 빈틈없이 꽉 찼다. 김치, 소금, 베이컨, 모닝빵, 소고기 스테이크, 불고기, 국거리 고기, 요구르트, 치즈, 애들 내복, 내 잠옷, 신랑 티셔츠.... 마트를 통째로 옮겨왔다. 


'이거 있어? 사 갈까?' 일주일 전부터 카톡이 쉴 새 없이 울렸었다. '다 있어. 그냥 와.' 하고 대답하지만 의미 없다. 모두 트렁크에 실려있다.


- 여기도 다 있다니깐. 내가 무슨 깡시골에 사는 줄 알아?

- 누가 아니라니. 딸 준다고 난리야. 니 아빠 고집을 누가 말려.


엄마와 나의 핀잔을 아빠는 이번에도 허허허, 웃음으로 넘겨버린다.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얏호' 하고 폴짝 뛰어올랐다고 했다. 아직 남아선호 사상이 남아있던 80년대였기에 그리 흔한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아빠는 시대를 앞서간 딸바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엄마가 만든 음식보다 아빠가 만든 음식을 더 좋아했다. 엄마는 나물, 멸치국물 같은 담담한 음식을 좋아했다. 자고로 음식은 기름 맛이라 생각하는 나는 엄마의 나물 5종 세트가 나오는 날엔 밥알을 깨짝깨짝 세기만 했다. 역시나 퇴근핰 아빠는 딸이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말을 듣고는 펄쩍 뛰었다. 에 오마자 부엌으로 가 후다닥 매콤 달콤 제육볶음을 만들어냈다. 정신없이 제육볶음을 퍼먹다 고개를 들면 아빠는 흐뭇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는 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은 무엇이든 만들어줬다. 요리를 업으로 삼은 사람도 아니면서 곱창전골, 샤부샤부, 장어구이 같은 고난도의 음식을 뚝딱 해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어떻게 조리법을 알았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아빠의 음식과 사랑을 먹으며 나는 포동포동 살이 찌고 키가 컸다.


그런 내가 결혼을 했다. 사실 결혼 전 나는 염려를 했었다. 워낙 예뻐하던 딸이었기에 그 사랑이 집착으로 변할까 봐 두려웠다.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 못지않은 게 장인의 딸 사랑 아니겠는가. 8시만 되면 어디냐며 전화를 하던 아빠였다. 신랑(당시는 남친)과 데이트를 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랑도 만만치 않은 장인이 내심 고민되었을 거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결혼식 이후 아빠는 나에 대한 모든 관심을 거짓말처럼 싹 거두어 갔다. 전화 한 통 먼저 하지 않았다. 8시가 넘어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그제야 내가 진짜 결혼을 했음을 실감했다.  







- 엄마, 딱지 접어줘.

- 조금 있다 해줄게.

- 금 해줘!


네 살 둘째가 달라붙는다. 아빠가 가져온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있던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때 아빠가 외친다.


- 저기 가서 놀아. 우리 딸 힘들어.


순간 내 아들에게 모질게 대하는 아빠가 불만스럽다. 하마터면 '애한테 왜 그래'라고 쏘아붙일 뻔했다. 다행히 엄마가 둘째를 데려가서 놀아줬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계속 남아있다. 아빠는 왜 손자들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 걸까? 아들 둘을 키우느라 팍팍 늙어가는 딸이 안타깝다지만, 내가 낳은 아들들이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사랑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내 아들들이 더 신경 쓰인다. 이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나보다.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그 커다란 통에 사골국물 봉지가 가득이다. 어릴 때부터 사골국물이라면 끔뻑 넘어가던 나였다. 아빠는 딸내미 먹인다고 신나게 만들었겠지. 핏물 빼고, 솥에 끓이고, 봉지에 담아 꽝꽝 얼리느라 이틀은 족히 고생했을 아빠가 그려진다. 봉지마다 진한 사랑이 고아져 있다. 그런데 아빠는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이 사골국물을 거의 먹지 않는다. 최근 들어 고기 맛을 알아버린 내 아들들에게 다 퍼준다. 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씹는 것을 보면 내가 먹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제육볶음을 퍼먹던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기분이 이런 거였을까? 아빠는 나를, 나는 내 아들을. 사랑은 계속 내려만 간다.






- 딸, 이리 와서 먹어봐.


그 사이 아빠는 골뱅이 소면을 만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매운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아이 반찬과 어른 반찬을 따로 만드느라 에너지를 배로 쓸 바에, 그냥 매운 것을 안 먹는 것을 선택했다. 그걸 아는 아빠가 일부러 매콤한 음식을 해준 것이. 아빠 올 때만 누릴 수 있는 호강. 골뱅이에, 양파에, 국수에... 이런 건 또 언제 다 싸 왔나.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매콤한 양념에 나는 연신 물을 들이켰다. 


- 아빠, 진짜 맛나.

- 많이 먹어 우리 딸. 허허허.


아빠의 웃음소리가 거실에 부드럽게 퍼졌다. 평생 갚지 못할 사랑이다. 입속에 들어온 골뱅이가 쫄깃하다.







이전 04화 난장판 레고 속에서 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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