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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10. 2024

눼? 황금이모라고요?

"어머, 요새 이런 황금 이모가 어디 있어요? 아침부터 조카들 어린이집에 데려다줘, 끝날 때 다시 데리고 와, 주말이면 데리고 나와서 놀아 줘. 진짜 황금이모시다."


한 여자가 수년 전 '이모'라는 지위를 갑자기 부여받는다. 그것도 쌍으로 두 명에게서. '이모'라는 지위를 부여받자마자 이 여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덜컥 강제로 어른이 된다.

여자에게는 자신보다 먼저 어른이 된 여동생이 하나 있다. 그 동생은 '이모'보다도 무서운 '엄마'라는 지위를 덜컥 떠안고서 두리번거린다. 내려놓을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이내 당혹스러워한다.


많은 여자들이 자기 인생을 제대로 책임지기도 전에 발가벗겨진 한 생명체를 갑자기 떠안는다. 많은 딸들은 아기를 낳고서야 깨닫는다. 자기가 제 엄마에게 지었던 죗값을 드디어 치러야 할 때가 왔음을…….  딸들이 뒤집어쓴 죄목은 가지가지다. 사춘기 시절, 자신의 엄마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올 때 "아, 몰라", "짜증 나!", "됐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등의 말을 건넸던 '말본새 괘씸죄' 또는 '공부해'라는 말에 어깃장을 한두 번 내려던 것이 그만 쌓이고 쌓여, 결국 정말 공부 못 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 '어깃장 후폭풍 자업자득 죄.' 그 녀석은 안 돼,라고 하는데도 가진 것 없는 그 녀석과 훌쩍 결혼을 해 버려 정말 가진 것 없는 채로 아이까지 가지게 된 '엎친 데 덮친 죄' 등등. 이렇게 엄마가 된 딸들의 죄목은 줄줄이 사탕을 엮고도 남는다.

 

자식을 갓 낳은 당사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공소 시효가 훨씬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뒤늦은 처벌을 받곤 한다. 그건 바로 '육아'라는 희대의 형벌.


딸들은 어쩔 수 없이 형벌을 나눠 가질 동료들을 찾으려 주변을 살핀다. ("내 동료가 돼랏!") 그러다 저도 모르게 짓게 되는 또 다른 죄목. 바로 '손주 보는 재미라도 있으셔야죠.'라는 말을 부모에게 흩뿌리고 다닌 '유언비어 유포죄'. 결혼해서까지 부모님에게 손주를 맡기는 일을 '손주 보는 재미'로 교묘히 엮는다. 이제는 딸들에 이어 손주까지 제 부모의 등에 빨대를 꽂는다. 할무니, 할무니. 어이구, 우리 새끼, 우리 새끼. 할머니들은 쪽쪽 빨리는 줄도 모르고 제 젊음을, 딸들에 이어 손주들에게까지 대물림하듯 빨아 먹힌다.


       

이때 그 딸들 옆에 있던 언니나 여동생 들, 즉 수많은 이모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들을 내다본다. 그러나 그 찬란하고 오묘한 불빛이 자신에게도 불똥이 되어 튈 줄은 전혀 모르고 마냥 신기함과 뭉클함, 거룩함 들로 자신의 마음을 도배하곤 한다.


여기, 자기 등에 큼직한 빨대 두 개가 꽂힌 줄도 모르고 시나브로 에너지를 빨리는 한 여자가 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니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젊음을 쪽쪽 빨아 먹히고 있는 '이모'라는 여자. 심지어 진작부터 남편도 남자 친구도 없이 중년의 문턱으로 훌쩍 넘어가려는 여자. 불현듯 찾아온 '이모'라는 극히 여성적인 지위를 받아 들고서 이걸 어디에 얹고 가야 하나, 어디쯤 내려놓아야 하나 망설인다. 결국 이 여자는 주저함 끝에 오늘도 아침부터 '○○○ 키즈 어린이집'에 도착하고야 만다.

 


눈을 비비다 말아서 더 푸석해진 얼굴, 조금 덜 질끈 묶어도 좋았으련만 너무 세게 묶어서 쭉 찢어지려는 눈초리, 어제 입었던 바지 또 입는다고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무심코 입어 버린 무릎 나온 바지. 거기다가 '누가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다니겠어.'라는 심정으로 감지 않은 머리를 하고서 이모라는 자는 어린이집 벨을 누른다. 유리 현관 너머로 선생님이 얼른 마중을 나온다.


"어머어어어."

이 집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어머'라는 감탄사를 즐겨 사용한다. 아침부터 마치 동화 구연장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어머 어머, 현이, 호 왔어?"

"네, 해야지."

'네'에는 관심 없는 아이 둘이 신발 벗을 준비를 하며 바닥에 벌러덩 앉는다.



"어머, 이모님도(이모님 또) 오셨네요."

나는 저 선생의 말이 '이모님도'인지, '이모님 또' 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듣는 쪽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모양이어서 나에게는 오늘따라 저 말이 '이모님 또 오신 거예요'라고 들린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머, 자주 오시네요. 아니, 요새 이런 황금 이모가 어디 있어요? 조카들 어린이집에 데려다줘, 끝날 때 다시 데리고 와, 주말에도 놀아 줘. 지인짜 황금이모시다."


'어머 어머'의 연속인 이 여자는 지금 나를 보고 황금 이모라고 추앙하는 중이다. 이 말을 하는 저 여자는 같은 동네에 살기까지 하는 어린이집 선생이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경배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바로 나다.

"할머니에 할아버지에 이모까지! 어머님은 좋으시겠어요."

나는 웃는다. 물론 그중 반쯤은 애써 웃어 주는 웃음이다. 하지만 결코 타인의 말투에 녹록하게 속아 들지는 않는다. 필요하다면 내가 속지 않았다는 증거로 당시 반쯤 썩어 있던 내 표정을 정황 증거로 제출할 수도 있다.



"현이, 호는 좋겠네. 이렇게 좋은 황금 이모를 둬서."

'이렇게 좋은'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해서 하마터면 '잘하면 나도 황금 이모에 속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하지만 이런 달큼한 말들은 나를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세상을 속이지는 못한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황급히 숨기고 웃어 보인다. 입꼬리 당김근이 2초간 씰룩거린다.


'황금 이모라고?'

현이와 호는 황금 이모라는 자를 싱긋 돌아보다가 신발장으로 달려간다. 이 친구들은 이제 신발장에 자기 신발을 스스로 넣을 수 있을 만큼 제법 컸다.

"이모 빠빠이, 해야지?"

선생의 명령이 떨어지자 애고 어른이고 모두 선생의 말에 따라 손을 흔든다. 이모와 조카들의 손이 동시에 흔들린다.

'황금 이모라고? 내가? 왜? 어딜 봐서?'



어딜 봐서 이 몰골이 황금빛인가.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를 내려다본다.

'황금 이모? 호구 이모겠지.'

어린이집 유리문에는 정신없이 묶은 머리로 문을 열고 나서려는, 나를 닮은 내가 서 있다. 자세히 보면 역시 내가 맞다. 그리고 아침부터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가방을 챙기고 어린이집 선생들에게 육아라는 바통을 넘기느라 정신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다. 그들도 어린이집 문간에서 ‘어서 데려가 줍쇼’라며 자신의 아이들을 들이밀고 있다. 부스스한 머리로 문을 나서는 아빠들도 이따금 눈에 뜨인다. 나 같은 머리와 옷차림의 엄마 혹은 아빠들이 분주히 어린이집 대문을 오고 간다. 그들을 보면서 황금 이모라 불린 자도 이윽고 어린이집을 퇴장한다.



'후유.'

나도 이제 저 부모들처럼 오후 3시 반까지는 자유다. 조카들을 데리러 가는 그 시간까지 적어도 나는 '이모'가 아니라 '나'다. 황금 이모가 아니어도 좋고 호구 이모여도 상관없는 그냥 나란 존재다.


황금까지는 언감생심이더라도 그냥 보통 이모쯤은 해 두고 싶은 나. 오늘도 나는 부모님 집에서 늦은 아침밥을 얻어먹고 슬슬 하루를 연다. 어서 컴퓨터를 켜고 '사○인', '잡코○아'와 같은 구직 사이트를 뒤져야 하건만 제일 먼저 내 손가락이 반기는 곳은 '네이○' 사이트다. 아침부터 아기들에게 정성을 쏟느라 애썼는데 나한테 네이○ 5분, 10분도 못 줘? 나는 당당하게, 조금은 소심하게 네이○  '클릭질'을 나에게 허락한다.

 

때마침 황금 이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와 있다. 어린이날이면 여덟 사람, 즉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등 여덟 사람의 지갑이 열린다는 말의 'Eight Pocket'이라는 신조어도 있다고 한다. 이런. 나는 기사를 보며 '쯧쯧' 하고 혀를 끌끌 찬다. 기사 내용을 끌끌 차는 것인지 나를 보고 끌끌 차는 것인지, 아직 나조차도 결정하지 아니한 '쯧쯧'이다.

'쯧쯧거림'이 빙빙 돌다 결국 다시 나에게로 와서 화살을 멈춘다. 나에겐 지금 그 포켓이라는 것이 파업 중이다. '포켓'이 없는 이모는 황금도 호구도 될 수 없는 것일까.



이모라는 자는 이렇게 또 하루를 소비, 혹은 허비하다 시계를 본다. 어느새 시간이 삭제된 듯 벌써 3시 반이다.

다시 호구 이모의 시곗바늘을 힘차게 돌려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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