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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an 16. 2024

귀여워만 하면 돼

"나도 당신처럼 조카들을 귀여워만 하는 이모였으면 좋겠다."


남산만 하게 배가 불러오고 있을 때였다. 아가들이 배 속에서 위아래로 웅크리고 누워, 형 또는 동생 놀이를 하며 어미의 영양소를 쭉쭉 빨아대고 있을 터였다. 제 엄마가 엄마 역할보다 이모 역할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쭉쭉 커 나가고 있었을 우리 조카 녀석들. 내 몸이 다른 누군가의 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1년 내내 동생을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임산부 중에는 10kg에서 많게는 15kg까지 나가는 배낭을 십 개월 가까이 앞으로만 멘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앉으나 서나 배낭을 내려놓을 수도 없다. 그 배낭은 늘 뱃가죽에 달라붙어 있다. 일어날 때도, 앉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잠잘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절대 풀어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엄마가 된다.


물론 배낭 속에 진귀한 보물이 들어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365일 내내 그 배낭에서 나온 빛에 '매 순간 깜짝 놀랄 정도로 감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엄마라는 자들이 조금씩 조금씩 힘겹게 해내고 있다.


세상은 저절로 되는 일이 없다. 드라마에는 현실이 있고, 내 동생이 살아가는 현실에는 더더욱 드라마틱한 현실이 꿈틀거린다. 지켜만 보는 사람들은 임신부 본인을 포함하여 '한 몸에 있는 세 개의 심장 박동'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전에 하나의 심장일 때보다 세 배 이상 무겁고 커다란 심장박동. 그 빛나는 짐들을 들고 정상에 오를 때까지 동생은, 그리고 내 동생을 포함한 수많은 이 시대의 동생들은 숨을 가쁘게만 몰아쉬었으리라. 아이를 품는 동안 단 한순간도 혼자 편히 숨 쉬어 본 일이 없었을 테지.


동생의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니 그녀의 드라마와 나의 드라마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야, 너 그 드라마 봤어?"

"어. ○○ 나오더라."

"그 여자 주인공한테 ○○가 결혼하자 그러잖아."

"그런데?"

"그 여자 주인공 상황을 봐."

"맞아. 진짜 안 됐어. 아프잖아."

"그건 그렇지만 진짜 세상 참……."

"이번엔 또 뭔데?"

"야, 씨. 기억 잃은 여자도 결혼할 남자가 있는 세상인데, 아이씨, 우린 뭐냐."

"……."

친구의 성토를 듣다 나의 밋밋한 드라마를 돌아본다. TV 속 드라마엔 현실이 있는데 나의 현실엔 드라마가 없다. 내 동생에게도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가 널을 뛰고 있는데 나의 삶에는 어떤 극적인 장치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에게도 드디어 드라마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무언가가 생겼다.

"이모오오오오오."

"이뭐어어어어어."

몰래 육아 열차를 얻어 탄 이모를,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두 녀석들이 다정히 부른다. 그리고 갑자기 외친다.

"뇨뇨뇨뇨뇨뇨!"

'뇨뇨'가 무슨 뜻인지, 무슨 신호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이 친구들은 '뇨뇨뇨뇨'를 부르며 나를 힐끗 돌아본다. 그러고는 다시 앞장서서 마구 뛰어간다. '뇨뇨'를 신호탄으로 나도 녀석들을 향해 발바닥 소리를 내며 뛴다. '뇨뇨'를 시작할 때면 이모는 세상만사를 다 내려놓고 녀석들을 뒤따라야만 한다. 절대 아이들을 앞질러선 안 된다. 적당한 속도로 달려가 어흥, 하는 소리를 내질러 주어야 한다. 또, 두 친구들에게 세상 제일 웃긴 코미디언 표정을 지어 주어야 한다. 이 놀이는 절대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이 달리기를 '되감기' 버튼 돌리듯 계속해서 되돌려야만 한다. 언제나 '그만하자'라고 먼저 말하는 쪽은 헐떡거리는 이모 쪽이다.



"뇨뇨뇨뇨뇨뇨"

이 달콤한 고행 속으로 오늘도 나는 나를 던지며 달린다. 가끔은 ‘결혼하자’라는 말을 내뱉어 보지도 들어보지 못한 여자의 최후를 생각해 본다. 그런 여자의 최후는 이렇게 조카 뒤를 따라 뛰는 것일까?

"뇨뇨뇨뇨뇨뇨!"

녀석들은 이모가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자, 틈을 주지 않으려 이모에게 달려와 와락 안긴다. 그리고 다시 '뇨뇨' 놀이에 집중한다.  



동생이란 여자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 나는 공짜로 아이들을 만났다. 무임승차한 자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법이지만 동생이 탄 열차는 참으로 다양한 풍경을 내게 보여 준다. 나는 지금 동생이 보여 주는 풍경 속에 잠시 머문다. 내 옆 좌석에는 동생이, 그리고 그 옆에는 동생의 남자친구에서 남편이 된 한 남자가, 그리고 그들 옆에는 쌔근쌔근 두 녀석이 앉아 있다. 그리고 함께 육아 열차에 올라탄 이모 하나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두 녀석들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그러나 내가 승차권 없이 얻어 탄 이 열차는 언젠가 이 네 식구만의 열차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달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있는 힘껏 이 열차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 아직 이 두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그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들도 무척이나 많다. 기저귀 한 장면, 트림 한 장면, 배 밀기 한 장면, 뒤집기 한 장면,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하는 그 명장면들이 내게는 모두 다 소중하다.

눈앞의 풍경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호구가 되기로 작정한 이모. 오늘도 겸연쩍은 마음으로, 물론 내 아이는 아니지만, 내 아이 같은 이 조카 녀석들을 괜히 바스러져라 끌어 앉는다.


"이 녀석들, 잡히기만 해 봐."

내가 외친다. 녀석들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뇨뇨뇨뇨뇨뇨!"

내가 지쳤건 안 지쳤건 전혀 상관치 아니하는 두 남자가 나를 향해 다시 신호를 보낸다. 어서 뛰어! 허튼 생각할 틈이 없다고! 어서 날 따라 뛰라고.

"이모, 뇨뇨뇨뇨뇨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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