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라는 자가 직장을 관두던 날로 돌아가 보자. 이모를 제외한 모두가 고무된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사회에서 낙오된 이모를 온 가족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환영한다.
자, 이제 전 뭘 해야 하죠? 있어 봐.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이모가 백수가 된 첫날, 사람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이모 혼자 두 아이를 실컷 구경하도록 서둘러 자리를 비켜 준다. 그동안 일하느라 애들 얼굴 제대로도 못 봤지? 자, 이제 맘껏 보렴. 때마침 육아이모로서 출발하는 그날은 부활절이다. 모두 부활을 외친다. 그러면서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 떠나갈 채비를 한다, 물론 이모만 빼고.
집안으로 기어들어 온 호구 이모는, 스리슬쩍 아이 둘을 놔두고 방을 나서려는 다른 식구들의 발랄한 걸음걸이를 멍하니 쳐다본다.
"아니, 집에서 애나 보려고 그래?"
아가들은 억울하다.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애나 보는 사람'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네. 애'나', 말고 애'를' 보려고 관둡니다."
이모가 된 뒤로 처음으로 제대로 내 할 말을 하며 씩씩하게 짐을 쌌다. 많은 짐을 욱여넣는데도 마음이 이렇게 가벼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실, 점심을 몇 번 건너뛰기 당하면서 내 영혼은 이미 나도 모르게 마음을 굳혔는지도 모른다.
"카라, 오늘 점심 굶어. 일도 안 해 놓고 오늘 아침까지 대체 뭘 한 거야, 어?"
아침이 아니다. 정확히는 어젯밤부터다. 어젯밤부터 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내게 일을 시킨 건 어젯밤 원장의 퇴근길이었다. 나는 어제 숙직 당번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업에 관해 결과보고서를 쓰란다. 관련 서류들이 불안한 내 눈빛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사업계획서도 쓰지 않았던 사람이 잠도 밀쳐 두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결과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사업이 계획되고 마무리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바뀌어 나간 사람만도 여덟 명이라고 하였다.)
밤이 깜깜해져 오고 있었다. 당연히 내 마음도 덩달아 깜깜해져 갔다. 나는 이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 아침, 원장을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는 안 된다. 끝끝내 이 사업의 결과들을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깜깜한 잠에 푹 빠져들었다. 사람이, 잠도 좀 자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이 닥친다. 아침의 훈계는 원장님의 성경 구절로도 이어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름으로 아멘. 저 입을 막아 주소서. 하지만 이곳은 사실 성령이 가득 찬 곳이다. 곳곳에서 십자가와 성모마리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의 하느님이 원장의 하느님과 같은 '님'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놀랍고 때로는 두렵다. 아침의 잔혹한 잔소리가 겨우 끊기나 싶은 오후 무렵,
"개떡 같아. 카라는 정신 좀 차려야 해. 뭘 썼으면 제발 좀 제자리에 갖다 두라고."
오후가 되자 이젠 원장의 미니미인 팀장이 나선다. 개떡이라……. 딱히 못 들어줄 말은 아니다. 개떡이 뭐라고. 청소년들과 어울리던 옛 시절을 떠올려 보면 'ㅅㅂ', 'ㅈㄴ', '니 애미' 등등 더 험한 말들도 많이 들어 봤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청소년들이 내 귀에 차지게 들려주던 그 욕지거리들은 참 맛 좋은 느낌이었는데 이 팀장의 '개떡'은 영 맛이 젬병이다. 욕지기만 치밀어 오른다.
나 같은 개똥도 정작 약에 쓰려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나는 팀장에게 속으로 큰 개떡을 날린다.
내게 '카라'라는 이름이 붙었던 날들이 있다. 가끔은 헛웃음이 난다. 아등바등 욕먹어 가며 살아온 그 지난 7개월. 내게는 아직도 그때의 지독한 카라 향이 남아 있어 이젠 꽃이나 열매들을 봐도 좀체 향기를 느낄 수가 없다. 내가 다녔던 그곳은 입소자들의 인권 보호를 이유로 선생들에게까지도 꽃이나 열매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름을 가려 준다고 그 인권이란 것이 보호되진 않는다. 사람이 밥도 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밥까지 굶어 가며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말이다.
어느 날 아침밥을 먹다 말고 울음이 툭, 하고 밥상으로 떨어졌다. 주말 내내 숙직, 휴일 없는 평일의 시작. 집에 들어온 게 삼 일 만이었다. 직장 동료 한 사람이 관두자 숙직은 갑자기 배로 늘어났다. 가족을 보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가족을 만나는 '절대적 시간' 없이 버텨야 하는 직장은 정말로 퍽퍽했다. 점심을 굶은 그날 저녁, 나는 원장이 시켜 주는 중국집 짜장밥을 먹었다. 맛있어야만 하는 저녁밥이었지만, 모두 동글게 동글게 모여 앉아 소리를 죽인 채 꾸역꾸역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었다, 곧 음식물 쓰레기가 될 남은 짜장 소스나 바라보면서.
그 순간, 나는 자꾸 무언가 얹히고 있는 내 미래를 느꼈다. 처음 욕을 들었을 때, 여기서 무언가를 배울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은 참고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게는 '열정페이'와 같은 정열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음을 불현듯 느꼈다. 배 속은 짜장밥으로 두둑해져 갔지만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배 껍질은 더욱더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냈다.
가정집 같이 생긴 곳에서 일하면 가족과 같은 분위기일 줄 알았다. 1층에는 입소자들, 2층에는 직원들이 사는 집이었는데, 그 가정집 같은 직장에서 나는 마당을 내다볼 여유도 없이 바짝 마음을 조이고 살았다. 그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 귀퉁이에서 항상 내 마음은 두 갈래로 망설였다. 가야만 한다는 현실과 되돌아 나오려는 내 발길 사이에서 한참을 씨름하였다. 저 모퉁이만 돌면, 저 모퉁이만 돌면, 그래
.. 그래,
또 지옥이구나…….
"썩어질."
상사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썩어질'과 '개떡'이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내 회사 일기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관두던 그 달, 마지막 내 통장에는 200만 원이 넘는 돈이 찍혔다. 내 월급이 오르는 첫 달이었다. '관둘게요.'를 내뱉으려던 바로 그날, 나는 그 당근을 바라보며 '개떡이면 어떻고 썩어 문드러질 영혼이면 어떠하랴.'라며, 뱉은 내 마음을 어떻게 하면 도로 주워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빈 노트를 하나 샀다. 내지가 노랗고 예쁜 노트였다.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다시 업무를 정리해 보자.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꽉 감고 귀만 열어 놓고 살자. 내가 이것도 못 견디나. 자, 다시 다녀 보자.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곰곰이 내 생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집 앞 버스 정류장에 엄마가 나와 계셨다. 갓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느라 너무 바쁘셨던 엄마였다. 아니 어떻게 마중을 다 나오셨어요?
'다들 힘들어서 힘들다'라는 엄마의 말씀을 어느 벤치에 앉아 들었다. 아직 4월인데 엄마의 봄이 벌써 끝나가고만 있는 듯 보였다. 집에 와 있는 사위 뒷바라지와 딸내미의 산바라지. 갑자기 늘어난 네 식구들. 갓난아기들을 돌보아 본 지 이미 삼십 년이 지난 엄마였다. 엄마가 새롭게 감당해야 하는 낯선 역할들. 엄마는 그새 살이 무척 빠졌다.
다들 흔히 겪는 일이라지만 동생은 자신의 분신들을 낳고서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평생 인연'을 만들었다는 게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두려운 듯 보였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동생의 얼굴이 그리울 정도였다. 나는 문득 가족들의 그 어깨를 헐겁게 해 주고만 싶었다. 아무래도 이 호구가, 내 지구를 지켜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았다.
"아니 저 여자는 자기 인생은 제대로 살지도 않고 아주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참 말도 안 되는 캐릭터네."
내가 언젠가 TV를 보며 마음속으로 크게 욕을 했던 여자가 하나 있었다. 드라마 속 여자는 참 답답한 사람이었다. 아니, 왜 저러고 살아.
그러나 사람,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도 괜히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런 인생을 조금이나마 살아 보고서야 알았다. 남 일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내가 욕했던 여자의 인생을 지금 내가 복사 및 붙여 넣기 하듯 살아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시 잘해 보자고 노란 노트를 사던 날, 나는 내 결정을 스스로 번복했다. 내가 힘드니까 관두는 거다, 가족 핑계는 대지 말자. 그것으로 직장을 관두는 이유는 충분하다. 아무려면 어때. 가족들이 날 필요로 하니 쓰레기 같은 직장, 이참에 관두자.
"관두겠습니다."
"아니 원장님이 성격이 좀 그래서 그렇지, 진심은 아니잖아. 원장님이 너무 힘들게 해서 그래요? 그래서 관두는 거야?"
아니, 너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싶었지만 나는 구구절절 가족들이 날 필요로 한다, 나는 여기를 떠나 가족들에게 가야만 한다는 다른 이유들을 꺼내 들었다.
"아니, 집에서 애나 보려고 그래?"
나는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기쁨의 노래를 높이 불렀다. 아버지는 잠시 뉴스를 볼 시간이 생겼고, 어머니는 여유롭게 식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동생은 남편의 지방 출장길에 가끔 따라나설 수도 있었고 자신의 일을 슬슬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실컷 쌍둥이들을 구경(?)만 하면 되었다.
종종 나는 그때 그 직장만의 규칙을 떠올린다. 그곳은 점심시간 후 휴식 시간이 없다. 다들 식사 후 바로 자리에 앉아 다음 일을 이어 가야만 한다. 지금 나는 도둑맞은 그때의 내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 직장을 관두고 나서 나는 지나가던 강아지만 봐도 눈물이 났고, 지나치던 장미꽃만 봐도 콧물이 났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나는 분명 그 직장에서 개떡 혹은 호구였지만 적어도 그때 내 가족들에게만큼은 황금이었다. 호구와 황금은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무려 '점심'을 먹는다. 점심 후에는 이렇게 산책도 한다. 그 직장에서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물론 2인분의 산책이다. 허리가 잠깐씩 '나 끊어질 것 같아'라고 내게 말을 걸어오곤 한다. 그럴수록 나는 내 품을 더욱 세게 감싸 쥔다. 지금 내 품에는 내 품보다 더 커지고 있는 조카 녀석 하나가 동그랗게 안겨 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일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