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May 18. 2024

연락이 늦었습니다만

앗. 죄송합니다. 문자를 인제 확인했어요.


그렇다. 나는 죄송해야 했다. 백번이고 천 번이고 거듭 죄송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죄송했어야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정확히는 3개월 20일 전쯤에 죄송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눈을 씻고 문자가 발송되었던 시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2023년 1월 2일.


그리고 문자를 확인하던 당시 날짜는.. 3월 23일...

타임 슬립을 하는 시간 여행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4개월씩이나 시간을 건너뛸 수 있었을까. 정녕 나는 제정신이었던 것일까. 친구나 가족의 문자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자는 그런 성격의 문자가 아니었다.


1.
안녕하세요, 강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ㅎ
한 해 동안 온라인 수업을 이끌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2.
강사님 수업하시면서 업데이트하신 교안 ppt 자료를 받아 볼 수 있을까요?! ㅎㅎ

3.
확인 부탁드립니다.
(세 개에 걸쳐 sms 형식으로 온 메시지였다.)


무려 '직장 사람'의 문자였다. 정확히는 나를 고용한 업체의 차장님. 아무리 문자를 받았던 시점에 나의 계약은 이미 종료된 상태라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계절이 바뀌고서야 문자 확인을?




변명을 대 보자면

낡은 휴대폰이라 문자 알림이 잘 안 뜬다. 그래도 그렇지.

계약이 끝났으니 직장에서 연락이 오리라고 생각도 안 했다. 그래도 그렇지.

평소 문자 확인을 '모두 확인'으로 해 버릴 때가 많다. 그래도 그렇지.

원래 잘 덤벙댄다. 그래도 그렇지.



업무 관련 이야기라 그런지 평소 문자로만 연락을 주시던 분이었다. 당시 헌 휴대폰을 쓰고 있던 나는 카톡도 문자도 바로바로 확인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원래도 꼼꼼히 확인을 안 하는 편이었는데 설상가상 휴대폰까지 말썽이었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자그마한 숫자로 뜨는 것을 못 견뎌하는 내 동생은 나의 휴대폰을 볼 때마다 유튜브나 인스타 알림, 쌓여 있는 카톡 오픈 채팅방의 100이 넘는 숫자, 그리고 50~60개의 확인 안 한 문자 메시지 표시.. 이런 것들을 보며 경악을 하곤 한다.)

 


내가 확인하지 못해 놓고 '카톡으로 주셨으면 내가 확인쯤은 했을 텐데'라는 애꿎은 원망도 들었다. 나 말고 다른 강사들도 있었기에 저 문자의 내용은 나 없이도 금세 해결이 되었을 것이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삼사 개월이 지나서 뒤늦게 나의 게으름과 안일함을 탓해 보았자 내 속만 뒤집어질 뿐이다.


하아. 나도 나를 못 말린다. 그저 속이 바싹 마를 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선택지는 대략 두세 개였다.


1. 모른 척 '쌩' 시도

2. 이실직고 후 실수 인정 및 사과

3. 자숙의 시간 후 다시 생각


아무리 봐도 1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기엔 양심이 우당탕탕 덜커덕거린다. 1번으로 행동할 경우 언제든 자꾸 내 마음에 남아 나를 뒤흔들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혹시 다시 일을 시작하게 그분과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 말씀을 떠올리자. 아버지는 늘 '정도를 걷자'가 우리 집 가훈이야, 라고 하셨다. 그래, 정공법, 2번이다!



나: 과장님(당시엔 승진 전이어서 과장님이셨다.)
뒤늦게 너무 죄송합니다. 작년에 수업 끝나고서는 문자를 거의 확인하지 않고 지내는 바람에 큰 실수를 저질렀네요. 뜬금없고 제가 봐도 어이없지만 너무 늦은 사과를 드립니다;;; 올해에도 평안한 한 해 보내셔요. 죄송합니다.

차장님: 앗ㅎㅎ 괜찮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연락 와서 너무 좋네요. 날이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세요.

나: 흑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제가 좀 노답입니다.) 저도 넘 반가워요, 과장님! 따뜻한 봄날 보내시고 환절기 감기 조심조심하셔요.

차장님: 흑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제가 좀 노답입니다.) 저도 넘 반가워요, 과장님.. 따뜻... 에 하트 표시


헉. 하트 표시, 라는 답장이라니... 이런 대인을 보았나. 나 같은 소인배를 너그러이 넘겨 주신다. 가끔은 세상이 넓어서 참 다행이다. 나 같은 덤벙도 너끈히 받아 주니 말이다.  



내 삶은 이렇게 '그래도 그렇지'의 연속이다.

하루아침에 쌓아 올린 '덤벙'의 서사가 아니다.


그때 머리는 어디 있었을까.

 정신머리는 종종 어디로 가출하는 걸까. 

MBTI가 P가 아닌 '꼼꼼한 J'였다면 내 덤벙의 역사가, 조금은 달랐을까.


덤벙은 종종 '죄송'을 부른다.

'미연에 방지'를 모르는 나의 덤벙, 대체 어디로 흘러가려는 걸까.


나도 내 이야기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이전 01화 덤벙의 서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