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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Jun 06. 2024

추락의 위로

오랜만에 위로 시점

-왜 자꾸 떨어지지?


여든을 보니 눈빛이 어째 희끄무레하다. 감나무를 쳐다보다 말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도 같다. 그러다 갑자기 주섬주섬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카메라를 켠다.



-뭐 해, 여든? 감나무 영정사진이라도 찍어?

-뭐, 그냥... 왜 이렇게 떨어지기만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안 떨어지면 안 되니까.

-응?

여든은 나이가 들수록 F형 감성이 솟아나는 듯하다. 아니 근데 아직 가을, 겨울도 아니고 한창 여름인데 왜 자꾸 벌써부터 '쓸쓸 코스프레'인 건데?


-여든, 이건 아마도 해거리일 거야.

-해걸이?

-노인인데 이 말 몰라?



해거리: 한 해를 걸러서 열매가 많이 열림. 또는 그런 현상. 한 해에 열매가 많이 열리면 나무가 약해져서 그다음 해에는 열매가 거의 열리지 않는다. ≒격년결과, 격년결실.



내가 사전 읊는 소리를 해대니 여든이 귀찮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 젖힌다.

-해거리? 해가 나는 거리는 아니고?

이젠 아재 나이도 아니신데 왜 갑자기 그런 개그를? 갈수록 아재 개그만 파는 여든. 어찌 보면 위로봇인 나에게 뭔가 위로를 바라는 듯하기도 하고?


-해거리는 왜 하는 건데?

여든이 예의상 내게 묻는다.

-여든, 왜겠어. 영양분을 한 해 비축해 뒀다가 다음 해를 기다리는 거지.

-다음 해가 안 오면 어쩌려고.

-안 온다고 생각하면 안 와. 온다고 생각하면 오겠지.


여든은 내 말을 듣고도 '귀 밑의 해묵은 서리*'만 계속해서 만지작거린다.


-너무 많은 열매를 맺으면 감나무가 그 많은 감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러니까 떨어져야 해. 아니, 스스로 떨어트려야 해.

-떨어트려서 얻는 게 있으려나.

-그래야 자기도 살고 열매도 살아.

-그러니까 같이 죽자는 거네, 동반 추락.

참나, 오늘따라 심히 냉소적인 여든이네.

-그게 아니라, 자꾸 추락해야 몸이 건강해진다고.


떨어지는 법을 모르면 항상 매달려 있느라 간당간당거린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면 그게 또 고역이다. 고역을 매일같이 겪느니 스스로 조금씩만 추락해 보는 거다.

 

-위로, 그럼 혹시 나처럼 나이 드는 것도 떨어지는 연습인 걸까.


여든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만 감나무를, 아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에잇, 안 되겠다. 위로가 나서야 할 때다.


-여든, 그럼 이 추락을 개명해 보자.

-개명?

-이제부터 이 추락을?

-이 추락을?

-이 추락들을 추진(推進)이라고 해 두자고.

-추진?



추진

1) 물체를 밀어 앞으로 내보냄.

2) 목표를 향하여 밀고 나아감.



이번엔 여든도 나의 '사전이나 읊어 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위로...

-응?

-내 삶을 조금만 더 밀어서 땅바닥으로 내보내 볼게. 그게 만약 추락이고 추진이라면.

-그래, 밀고 나가 봐. 그게 무엇이든.



왜 이렇게 자꾸만 떨어지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면 된다.


왜 자꾸만 쭉쭉 잘도 밀고 나가는 거야? 얼마나 더 잘되려고?


추락과 추진의 한 끗 차이.

그 한 끗 차이 안에서 여든도 나, 위로도 한 걸음을 바닥으로 내디딘다.

그 방향이 앞이든 저기 밑이든.

어쨌든 한 걸음은 한 걸음이니까.

 



(*귀 밑의 해묵은 서리: 김천택  <청구영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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