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Nov 17. 2019

단 하나뿐인 내 인생책을 소개합니다

아버지, 인생은 몇 번이 정답인가요?

과년한 딸이 발목을 붙잡고     

하아. 이분 딸내미들, 왜 이렇게 부모 속을 썩일까. 제때제때 알아서들 시집도 가고 그래야 부모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편할 텐데.. 이 딸내미, 시류에 편승하느라 노처녀가 되려는 걸까, 설마?     




마누라 뒤를 따라 졸졸 졸졸     

한때 잘 나갔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또 한때는 집안에서 목소리가 컸을지도 모를 이 양반. 어쩌다 마누라 눈치를 보며 장바구니나 들고 다니는 신세가 된 걸까. 그래도 이제 다행인지 어쩐지 이분도 세상 변한 줄은 알기에, 또 마누라 귀한 줄도 알기에 지금은 세상 속도에 맞추어 집안일에 취미를 붙인다. 부디 이 남자의 새 취미가 가족들을 웃게 하길!     



그 노인네 아직도 살아 있나

아직도 살아 있다는 그 세월에 딱히 원망도 그다지 큰 미련도 보이지 않는 이 남자, 이 노인. 사는 동안 무어 그리 마음이 아팠을까, 무어 그리 죄스럽게 살았을까. 뒤돌아보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겸손히 고백하지만 왠지 나는 알 것만 같다. 그가 남긴 자국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선명한 봄을, 감사한 생명을 따뜻이 안겼으리라는 사실을... 그가 준 생명으로 그 자국들은 또 자신만의 길을 내고 새로운 생을 충실히 이어나가고 있으리라.




고향은 남쪽이요, 남쪽 봄바람은 맞은 지 오래     

남자는 섬사람이다. 몸도 마음도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라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아내 앞에서, 또 큰딸 앞에서 자신이 두고 온 그 고향 풍광을 눈앞에 펼치듯 생생히 그려 보인다. 몇 번씩이나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하품을 하는 청중이지만, 그는 경청이라고는 1도 모르는 큰딸에게 또다시 그 섬을 자랑한다. 태초에 자신을 품어 준 그 무변대해의 바다이기에, 평소 과묵한 그 남자는 언제든 섬 이야기만 나오면 두 눈을 반짝이며 고향을, 그 섬을, 아니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그 남자에게 그 섬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 동의어이다.      




어디서 많이 뵌 듯한 분이옵니다만?

이 남자, 가만 보니 잘생겼다. 더 가만 보니 젊었을 때 연애편지 꽤나 받아 봤을 고운 얼굴이다.(콧구멍은 좀 크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뜯어보니, 이 남정네, 정말 어디서 많이~ 아주 많이~~ 보던 양반이다. 사실 종종 나는 이 남자에게 이런 말을 건네곤 한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내 방문을 열고 나서면 이 남자가 새벽부터 우리 집 거실에서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굳건한 이 남자의 등에 대고 간혹 이렇게 외친다.



아빠~!
쌍둥이 하부지~



그렇다. 이 남자는 내 아비, 나의 아버지다. 평범하게 이 생을 살아가고, 평범한 듯 특별한 듯 자신의 생을 묵묵히 글로 짓는 우리 아버지다.

우리 아버지의 글씨체로 책 표지를 지었다.


이 책은 6년 전 출간이나 판매라는 목적 없이 짓고 쓰고 인쇄한 어느 한 남자의 자기 고백이다. 소소히 가족과 친지끼리만 돌려보며 입말로 사소한 독후감을 나누었던, 내 아버지의 '인생 첫 책'이기도 하다. 인생책을 소개하는 이 자리에 수많은 책들이 내 안에서 경합을 다투었지만 결국 내 인생에 이만큼이나 온몸으로, 온 생을 다해 영향을 끼친 책이 없기에 이 책을 나의 인생책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내 인생책을 소개하며 '오물오물 씹어 먹는 아버지의 시간'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메일이 왔다."

"무슨 메일이요?"

"출판사에서."


우리는 분주해졌다. 우리 부녀는 최근 새로 쓴 글들로 투고를 했고 6개월 만에 응답을 받았다. 아버지는 검정 비닐봉지에 출판권설정계약서를 담았다. 정성껏 도장을 찍고 우리는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우리 부녀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인하는 기분이 어떠신가요?



"......"


아버지는 말이 없으시다. 아버지의 답은 늘 묵묵부답이다. 누군가는 그 답안지가 답답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안다. 정답은 원래 말이 없다. 딱히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인생, 그 속에서 아버지가 찾아낸 정답은 묵묵부답. 묵묵부답은 아버지가 찾은 아버지만의 정답이다.

이제 아버지의 인생책이 세상으로 출발한다.
아버지만의 편집자인 이 딸내미도 아버지를 따라 출발한다.
오물오물 씹어 먹던 아버지의 시간, 그 시간이 드디어 맛 좋게 길을 내기 시작한다.




이전 24화 지도로 가득한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