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Nov 17. 2019

걱정 말아요, 내 아버지 그대여

아, 나 혼자였지

“어이쿠. 축하하네. 진짜 자네 집안의 큰 경사구먼?”

 아버지가 친구 분과 통화를 하신다. 그간 살아오며 경사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집안인데 그 집에 그새 또 경사가 났나 보다. 그분은 남들이 우러러볼 만한 곳에서 일을 하셨고, 자식들도 훌륭히 키웠다던 분이셨다.


“아직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했어. 자네한테 먼저 이야기하고 싶었네.”

 친구 분은 아버지께 처음으로 자신의 경사를 알린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잘했다고, 정말 축하한다고 이런 경사가 어디 있느냐고, 애썼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축하를 해 주셨다.

 

“오늘 낮에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지금 우리 부부, 술 한잔 기울이고 있네.”

 오래전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 난데없이 자신의 기쁜 소식부터 전한다.



“나? 나야 뭐 쌍둥이들 보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있지.”



아버지는 기쁜 소식인지 힘든 소식인지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로 자신의 근황을 알린다. '수필 당선이라는 친구의 자랑에 떡두꺼비 같은 쌍둥이 손자 자랑으로 맞서고 계시는군.' 큰딸이 옆에서 아버지의 전화를 엿듣는다.



 “자네 애썼지. 아무렴, 그렇지.”

 사실 나이 칠십 넘어 기쁜 일을 전하는 것은 자랑도 잘난 척도 결코 아니다. 자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아직 살아 있음’을 친구에게 귀띔해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그것만으로 기쁜 일이다.


출처: pixabay


그런데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시고 나서 기척이 없으시다. 방에서는 조용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손가락 소리,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 가만히 앉아 있는 소리……. 이미 조금 열린 방문을 조금 더 연다. 아버지는 방 안에서 뒤적뒤적 무언가를 꺼내어 한 장 두 장을 넘기신다. 최근 써 놓은 몇 장의 문장들과 몇 해 전 제본으로 만들어 놓으신 당신의 책이다.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남으신 자신의 그 책들을 다시 한번 훑으신다. 아버지는 지금 책 속 어느 쪽, 어디쯤에 서 있는 자신을 만나고 계신 걸까.



“아버지 뭐하세요? 친구 분 수필이 당선되셨다고요?”

 나는 슬며시 아버지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그 친구 고독한 친구야.”

 아버지가 그 친구의 고독을 뜬금없이 딸에게 꺼내 드신다.


“어떻게 고독한데요?”

 방금 전 자신의 기쁜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하던 그 친구가 어떻게 갑자기 ‘고독한 친구’로 둔갑한다는 말인가 싶다. 잘 나가는 친구가 끝까지 잘 나가고 있고, 열 개의 꿈 중 여덟 번째쯤 되는 꿈을 이루고 있다. 그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게다가 지금 타인이 이룬 그 꿈이 과거 내 꿈과도 닮아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는지. 나라면 조금은 쓸쓸할지 모른다. 나 같으면 조금 질투가 날지 모른다. 나였다면 왜 하필 나한테 전화해서 그 일을 자랑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는 시선은 나와 다르다. 그 친구 고독한 친구야. 딸에게는 이런 말을 건네신다. 그리고 친구에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가식 없는 웃음을 전하신다. 호탕하게, 그리고 순순하게 친구를 축하해 주신다. 그러고는 그 친구를 토닥이신다. 하지만 나는 못된 시선으로 아버지를 들쑤신다. 아버지도 더 깊숙한 ‘마음의 바닥’ 저 아래에서는 혹시 ‘나는 왜?’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내게서는 ‘왜’ 그 꿈이 달아났는가. 한 번쯤 자문하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어떻게 고독하신데요, 그 친구 분?”

나는 그분의 고독을 적확히 설명해 주길 아버지에게 요청드린다. 얼마나 고독한지 살펴본 후 ‘수필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이 그분 인생에서 정말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라면 이 딸도 그 친구의 고독을 인정해 드리겠다는 취지로 묻는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나.”

 설명할 수 없는 고독이라는 답만 되돌아온다.

 “그래도 그분도 언제 고독하고 뭣 때문에 고독한 게 좀 있을 거 아녀요?”


그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 딸 넷인 집에 태어나 집안의 기둥처럼 자랐다고 한다. 부모나 형제자매의 듬직한 기둥이 된다는 것, 그 무게는 몇 kg쯤 되는 것일까. 친구가 지녔을, 종잡을 수 없는 고독의 무게를 아버지는 조용히 감싸 안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걸어온 고독과 그 친구가 껴안고 살았을 고독 모두를 품는다. 몇십 년의 그 고독을 알기에 아버지는 진심으로 친구를 축하해 주신다.    



그럼,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언제 고독하세요?     

 




길을 걷다가     



길을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 내가 착각했었구나.     

-아, 그렇지,

이 길은……. 나 혼자 걷는 길이었지.


2010. 5.     




나도 같이 출발한 친구들이 있었다. 각자의 삶이기보다 매일이 비슷비슷한 삶이었던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들, 그리고 전공이 같았던 대학교 때 친구들. 열심히 같이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돌아보니 나 혼자 달리고 있었다. 저만치 앞에서 친구들이 가끔 나를 돌아다보곤 하였다.

 


 “공부하느라 애쓰는데 얘 좀 많이 먹이자.”

 늦깎이 취업준비생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감자탕 집에 간 적이 있다. 친구들은 내 돈만 걷지 않았다. 그 대신 나에게 따뜻한 감자탕을 사 주었다. 친구들은 내 밥그릇에 돼지고기가 달린 뼈다귀와 감자를 더 얹어 주었다. 비록 감자탕을 많이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때 그 감자탕은 정말 뜨거웠고 든든했다.


친구들은 부모님께 용돈을 주는 어른이 되었다. 또한 늦게 걸어오고 있는 나 같은 친구를 챙기고 먹일 만큼 커다란 존재가 되었다. 이제 친구들 중에는 먼저 시집을 간 친구도 있고, 시집을 가서 초등학생 학부모가 된 친구도 있다. 자기 기반을 잡은 친구도 있고, 건강한 기업에서 자기 몫을 해내는 친구들도 있다. 다들 나보다 앞서서 달리는 듯 보인다. 뒤를 돌아다보았을 때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제일 느린 속도로 가장 늦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 길은 너 혼자 걷는 길이다.     




경쟁하듯 걷는 길이 아니라 혼자 걷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마 아버지도 혼자 걷느라 걸음걸음이 힘드셨을 것이다. 때로는 숱한 고독을 만나야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딸내미, 아주 조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다. 아버지가 수없이 나에게 ‘인간은 혼자란다’라는 말씀을 하신 그 이유, 내가 무언가를 스스로 해 내 본 적이 없어서 늘 나를 걱정하셨던 그 이유. 혼자이기에 외롭지만 혼자란 것을 알면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길을 걷다가 혼자임을 발견하면 쓸쓸하겠지만, 어차피 혼자 걷는 길임을 미리 안다면 조금은 덜 외로울지 모른다. 아버지의 글, '길을 걷다가'는 그런 뜻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런 아버지에게 이 딸내미는 이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걱정 말아요, 아부지. 나도 이제 조금씩 알아갑니다.’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시간을 이제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가려고 한다. 남들의 속도와 남들이 그려 놓은 지도에 내 위치를 억지로 그려 넣지 않겠다. 앞으로 내 고독은 내가 스스로 토닥이겠다. 그리고 아버지의 길도 같이 토닥이겠다.


아버지 혼자 걸어오신 그 길, 이제는 같이 걸어요.
걱정 말아요,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못다 핀 책을 펼친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도 펼친다.
"아버지 글이 세상과 같이 걸을 수 있도록 나도 아버지를 도울게요."
따로 또 같이, 우리 부녀는 길을 걷는다.
오늘도 아버지와 나, 서로의 마음을 잡고 같은 쪽을 향해 걷는다.          


이전 21화 자꾸만 늦어지는 딸내미의 출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