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Nov 17. 2019

자꾸만 늦어지는 딸내미의 출근

출근할 때 마음 다르고, 출근 안 할 때 마음 또 다르고

"나도 9시까지 가야 한단 말이에요!"


속에서 괜히 열불이 난다. 내 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위장이 고장 난 탓이다. 어제 미리 샤워를 해 두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에서 늦게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과연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아니, 나 출근해야 하는데 언니가 그렇게 늦게 나오면 어떡해!"

"동생 출근해야 하니까 좀 서두르지 그랬어. 목욕은 어제 하든가."   

 


옆에서 거드는 아부지가 더 밉다. 내가 왜?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아침에 샤워하면 안 되는 인간인가? 백수는, 임고생(임용고사수험생)은 그래야만 하는가? 나도 사람이고 게다가 나는 언니이기까지 하다.(갑자기 장유유서 모드) 


언니가 샤워 좀 하겠다는데! 동생이 샤워하기에 앞서 화장실을 좀 쓰면 안 되는가?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내 머리칼이 주책도 없이 뚝뚝 눈물을 떨어트린다. 동생과 엄마아빠의 말에 마음이 자꾸 더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출근 안 하는 사람은 출근하는 사람한테 시간도 일의 순서도 다 양보해야 하는 거야, 정말?(피해자 코스프레 쩌는 언니)



임용고사에 매달리던 20대. 그때의 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분개했다.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모래처럼, 바람처럼, 먼지처럼 작기만(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인용)' 했다. 아주 작은 것에 분개하는 초미세먼지 같은 존재. 그런 초미먼 같은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 다가온다.



-점심 사 먹어라.



갑자기 수험서가 가득 든 내 가방 위에 굵직한 손가락들이 다녀간다. 다녀간 자리에 돈 3만 원이 놓인다. 우리 아버지다. 아침 화장실 다툼이 가족들에게 번졌고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출근이 바쁜 동생의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언니가 되어 가지고 속이 배배 꼬여 입술이 한 줌 두 줌 튀어나온 상태였다.



야, 화 한 번 낸 값이 3만 원이나 되면
화낼 만한 거 아냐?

 



점심을 먹다 말고 당시 임고생 동지였던 대학교 친구가 웃으며 내게 한다. 오잉? 그런가? 그렇다면 역시 화는 내고 볼 일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아침 일을 내 머릿속에서 ‘해프닝’ 정도로 처리한다. 내가 괜히 욱했었나 보다며 3만 원 앞에서 경건히 자숙한다. 동전지갑에 작은 네모 모양으로 접혀 있던 만 원짜리 중 하나를 꺼내 친구 밥값까지 호기롭게 계산한다. 나는 그렇게 또 자식이라 이유로 마음 편히 부모에게 신세를 지고 만다.







그리고 5년 후...




"아버지, 지금 화장실 들어가실 거예요?"

"아니다. 너 먼저 들어가라."


 뻔히 아버지가 화장실 앞으로 가시는 것을 봐 놓고도 바쁜 나는 아버지를 가로막는다. 나의 시간은 빨리빨리 돌아가야 하고, 아버지의 시간은 좀 늦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한창 이 나라의 주역으로서 일하는 삼십 대이고, 아버지는 일선에서 다소 물러나신 칠십 대이다. 나는 뭐가 그리 당당하고 당연한지 아버지의 차례를 새치기하며 재빨리 화장실로 쏙 들어간다. ‘출근하는 자’라는 왕관을 쓰고 위풍도 당당하게 아버지를 뒤로 밀고 2009년도의 딸내미가 아버지 앞으로 나선다. 더는 임고생 때의 딸내미가 아니다. 게다가 회사원이 된 딸내미가 너무도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온 탓에 다음 차례인 아버지는 속절없이 딸의 구린내를 맡아야만 한다. 아버지는 자식을 낳은 숙명에 이어 화장실에서까지 묵언수행을 이어 가야만 한다.



"아, 참. 아부지, 어무니."

"왜?"

"한 달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용돈입니다."

"네가 수고했지! 뭐 이런 걸 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받는 게 편하지 않다시던 아버지 손에 보잘것없는 크기의 봉투를 건넨다.






아버지에게 삼만 원을 받아 챙기던 그 이십 대의 백수는 조금 늦었지만 제법 사회인인 척하는 어른이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당당히 용돈을 드렸으며, 이 부녀는 그 후로 아주 아주 오랫동안 잘 먹고 잘살았다...?


라고 끝나는 동화 속이면 참 좋으련만...




그러나 나의 현실은 기어이 동화책의 한가운데를 북 찢고 그 안에 현실감을 구태여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아버지, 저 어제 사직서 냈어요.

-뭐? 그래 뭐라고 하면서 냈냐.

-그냥 다른 일 알아본다고 말했어요.

-그래?

-네.

-잘했다.

-네.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2018년 12월 초. 한창 추울 때 하필 가족을 더 춥게 만들려는 듯 회사를 덜컥 관둬 버린다. 서늘한 인간관계에 치여 더 추운 겨울 속으로 뛰어드는, 어른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나다. 이런 아이 같은 나를 걱정해서인지 주변에서 ‘이거 해 볼래?’ 혹은 ‘저거 해 볼래?’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불현듯 아버지가 성난 어조로 내게 말씀하신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어 하셨고 그 바람을 65만 시간이나 뒤로 미뤄 두며 지금껏 살아오셨다. 그런 아버지의 시간이 나에게 말을 건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너가 진짜 하고 싶은 거... 그 말을 무슨 종교처럼 가슴에 새기고 맹신하며, 딸내미는 지금도 자판만 두드린다. 되지도 않는 글자 나부랭이를 쓰면서 남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희희낙락 구경만 다.    

  

그렇게 딸내미의 출근은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는...






그로부터 또 년 후...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 하고 살겠누?



출근을 무기한 연기한 딸내미 앞에서 아부지가 딸의 인생에 슬쩍 간섭하시려다 말고 그냥 쩝쩝거리고 뒤돌아선다. 언제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라고 하시더니...(하고 싶은 거 하라 했다고 요즘 나, 아주 제멋대로다.) 길어진 백수의 계절에 우리 아부지, 말 바꾸기의 기술만 늘어간다.


그렇게 딸내미의 '세상 출근'은 자꾸만 늦어진다.
지각도 보통 지각이 아니다.
(흠... 어차피 지각인 인생, 아예 느릿느릿 걸어가 볼까나?)
출근은 퇴사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렵기만 하다.



이전 20화 개구리 총각,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