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서 괜히 열불이 난다. 내 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위장이 고장 난 탓이다. 어제 미리 샤워를 해 두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에서 늦게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과연 뭘 잘못했단 말인가?
"아니, 나 출근해야 하는데 언니가 그렇게 늦게 나오면 어떡해!"
"동생 출근해야 하니까 좀 서두르지 그랬어. 목욕은 어제 하든가."
옆에서 거드는 아부지가 더 밉다. 내가 왜? 왜 그래야 하는가? 나는 아침에 샤워하면 안 되는 인간인가? 백수는, 임고생(임용고사수험생)은 그래야만 하는가? 나도 사람이고 게다가 나는 언니이기까지 하다.(갑자기 장유유서 모드)
언니가 샤워 좀 하겠다는데! 동생이 샤워하기에 앞서 화장실을 좀 쓰면 안 되는가?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내 머리칼이 주책도 없이 뚝뚝 눈물을 떨어트린다. 동생과 엄마아빠의 말에 마음이 자꾸 더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출근 안 하는 사람은 출근하는 사람한테 시간도 일의 순서도 다 양보해야 하는 거야, 정말?(피해자 코스프레 쩌는 언니)
임용고사에 매달리던 20대. 그때의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분개했다.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모래처럼, 바람처럼, 먼지처럼 작기만(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詩인용)' 했다.아주 작은 것에 분개하는 초미세먼지 같은 존재. 그런 초미먼같은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 다가온다.
-점심 사 먹어라.
갑자기 수험서가 가득 든 내 가방 위에 굵직한 손가락들이 다녀간다. 다녀간 자리에 돈 3만 원이 놓인다. 우리 아버지다. 아침 화장실 다툼이 가족들에게 번졌고 나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출근이 바쁜 동생의 편의를 봐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나는 언니가 되어 가지고 속이 배배 꼬여 입술이 한 줌 두 줌 튀어나온상태였다.
야, 화 한 번 낸 값이 3만 원이나 되면 화낼 만한 거 아냐?
점심을 먹다 말고 당시 임고생 동지였던 대학교 친구가 웃으며 내게 말한다. 오잉? 그런가? 그렇다면 역시 화는 내고 볼 일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늘 아침 일을 내 머릿속에서 ‘해프닝’ 정도로 처리한다. 내가 괜히 욱했었나 보다며 3만 원 앞에서 경건히 자숙한다. 동전지갑에 작은 네모 모양으로 접혀 있던 만 원짜리 중 하나를 꺼내 친구 밥값까지 호기롭게 계산한다. 나는 그렇게 또 자식이라 이유로 마음 편히 부모에게 신세를 지고 만다.
그리고 5년 후...
"아버지, 지금 화장실 들어가실 거예요?"
"아니다. 너 먼저 들어가라."
뻔히 아버지가 화장실 앞으로 가시는 것을 봐 놓고도 바쁜 나는 아버지를 가로막는다. 나의 시간은 빨리빨리 돌아가야 하고, 아버지의 시간은 좀 늦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한창 이 나라의 주역으로서 일하는 삼십 대이고, 아버지는 일선에서 다소 물러나신 칠십 대이다. 나는 뭐가 그리 당당하고 당연한지 아버지의 차례를 새치기하며 재빨리 화장실로 쏙 들어간다. ‘출근하는 자’라는 왕관을 쓰고 위풍도 당당하게 아버지를 뒤로 밀고 2009년도의 딸내미가 아버지 앞으로 나선다. 더는 임고생 때의 딸내미가 아니다. 게다가 회사원이 된 딸내미가 너무도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온 탓에 그다음 차례인 아버지는 속절없이 딸의 구린내를 맡아야만 한다. 아버지는 자식을 낳은 숙명에 이어 화장실에서까지묵언수행을이어 가야만 한다.
"아, 참. 아부지, 어무니."
"왜?"
"한 달 동안 수고하셨습니다.용돈입니다."
"네가 수고했지! 뭐 이런 걸 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받는 게 편하지 않다시던 아버지 손에 보잘것없는 크기의 봉투를 건넨다.
아버지에게 삼만 원을 받아 챙기던 그 이십 대의 백수는 조금 늦었지만 제법 사회인인 척하는 어른이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당당히 용돈을 드렸으며,이 부녀는 그 후로 아주 아주 오랫동안 잘 먹고 잘살았다...?
라고 끝나는 동화 속이면 참 좋으련만...
그러나 나의 현실은 기어이 동화책의 한가운데를 북 찢고 그 안에 현실감을 구태여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아버지, 저 어제 사직서 냈어요.
-뭐? 그래 뭐라고 하면서 냈냐.
-그냥 다른 일 알아본다고 말했어요.
-그래?
-네.
-잘했다.
-네.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2018년 12월 초. 한창 추울 때 하필 가족을 더 춥게 만들려는 듯 회사를 덜컥 관둬 버린다. 서늘한 인간관계에 치여 더 추운 겨울 속으로 뛰어드는, 어른아이. 그 아이가 바로 나다. 이런 아이 같은 나를 걱정해서인지 주변에서 ‘이거 해 볼래?’ 혹은 ‘저거 해 볼래?’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불현듯 아버지가 성난 어조로 내게 말씀하신다.
너 하고 싶은 거 해.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아버지는 글을 쓰고 싶어 하셨고 그 바람을 65만 시간이나 뒤로 미뤄 두며 지금껏 살아오셨다. 그런 아버지의 시간이 나에게 말을 건다.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너가 진짜 하고 싶은 거...그 말을 무슨 종교처럼 가슴에 새기고 맹신하며, 이 딸내미는 지금도 자판만 두드린다. 되지도 않는 글자 나부랭이를 쓰면서 남들이출근하는모습을 희희낙락 구경만 한다.
그렇게 딸내미의 출근은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또 반년 후...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 하고 살겠누?
출근을 무기한 연기한 딸내미 앞에서 아부지가 딸의 인생에슬쩍 간섭하시려다 말고그냥 쩝쩝거리고 뒤돌아선다. 언제는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라고 하시더니...(하고 싶은 거 하라 했다고 요즘 나, 아주 제멋대로다.)길어진 백수의 계절에 우리 아부지, 말 바꾸기의 기술만 늘어간다.
그렇게 딸내미의 '세상 출근'은 자꾸만 늦어진다. 지각도 보통 지각이 아니다. (흠... 어차피 지각인 인생, 아예 느릿느릿 걸어가 볼까나?) 출근은 퇴사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어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