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부터 하시던 말씀인데 며칠 전 친구분들을 만나고 온 여든 오빠는 다짐한 듯 보건소 방문을 선언하신다. 사실 늙은 아이는 점점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보다 보면 돌아오는 계절 하나하나가 퍽 소중하다. 그러다 보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의 세월이 닳을 것만 같다. 가끔씩 늙은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우울 버튼이 슬며시 눌릴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아야 하는데 여든 오빠랑 요리 언니는 왜 저런 소리를 하시는 거지?'
그런데 갑자기, 그리고 문득, '우울버튼'이 일순간 '역지사지 버튼'으로 바뀐다.
'혹시 주변 사람이 힘들까 봐?'
늙은 아이는 곧이어 생각한다. 그래, 나라도 내가 나이 가 든다면, 깔끔하게 살다 가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덜 힘들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늙은 아이에게는 이제 막 열 살이 된, 만 9세의 쌍둥이 조카가 있다. 그들이 계속계속 자라고 늙은 아이가 무럭무럭 늙어가다 보면 어느 날 어른이 된 쌍둥이 조카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우리 이모는 혼자서 저렇게 늙어가네. 내가, 우리가 이모를 돌봐야 하나? 봉양해서 하나? 효도해야 하나?
혼자 사는 '그냥 이모'가 언젠가는 혼자 사는 '늙은 이모'가 될지 모른다. '혼자'와 '늙음'이라는 두 단어가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버려 내가 '늙은 비혼 이모'가 되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까? 괜스레 신경 쓰이고 마음 한쪽 구석이 걸리는 부담스러운 존재. 또한 그저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왠지 모르게 짐스러운존재...?
짐스럽기만 하면 다행인데 죄스럽기까지 하면 안 된다.누가 되는 존재가 되면 아니 되지. 그래, 가자.
늙은 아이는 자신이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혹여나 모종의부담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린다. 그래, 보건소에 가자. 나도 가자.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를 따라가자.
역지사지 버튼은 늙은 아이를 보건소로 데려간다.
"두 분이세요?"
"아니요. 세 명이요."
보건지소에서는 해당 업무를 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세 식구는 보건소 민원실을 찾아 사정을 설명하고 민원실 뒤편 상담실에 들어가 관련 설명을 듣는다.
-의학적 치료(심폐소생술 외)를 일절 안 한다는 것이지 생명 유지 자체를 위한 처치를 안 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불법이에요. 담당 의사와 전문의 2명이 이에 동의해야 합니다.
여든 오빠, 요리 언니, 늙은 아이. 우리 셋은 신분증을 내밀고 설명을 듣고 신청서에 사인을 한다.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다. 한 달 뒤 관련 증서가 도착할 것이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들어가서 지금의 선언을 뒤집을 수도 있다고 한다.
늙은 아이, 아직은 삶이 뭔지 죽음이 뭔지 모른다. 삶을 모르기에 그 앞과 뒤의 모습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삶의 저 밑바닥에 숨어 있는 죽음이라는 모습도 물론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늙은 아이는 오늘,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과 어디 한 군데 삐걱거리지 않는 곳이 없는 노쇠한 몸. 기계도 오래 쓰면 닳는데 인간의 몸은 오죽할까.
그 몸을 사는 동안 아껴 주고 싶다.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의 <그 기계>를 살뜰히 지켜 드리고 싶다.
'우리'라는 기계가 굴러가는 시간 동안만큼은 무탈히 굴러가 주기를,
함께 늙어가는 기적 같은 행운을 내일도 허락해 주기를...
여든 오빠, 요리 언니.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그렇게 함께 늙어가요,
앞으로도 쭈우우우우우우욱..!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