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을 알고 보는 이야기. 인간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삶 뒤에는 두 글자의 마지막 결론이 나오기 마련. 그러나 알고도 본다. 언젠가의 끝을 느끼지만 또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 스포일러가 별거 있나, 사는 게 다 스포일러다.
하지만...
-오, 재방송한다! 이거 그때 범인이 누군지 못 보고 그냥 나갔었는데!
-아, 이거 그 여자애가 범인 아니야. 누구더라 그 왜 가족 가운데 그 사람 있잖아. 그 남자가 범인.
-아, 그만그만요! 아니, 나 이 드라마 안 본 건데... 그렇게 다 말씀해 버리면 어떡해유;;
살면서 늙은 아이가 여든 오빠에게 자주 하는 말. 주변의 반응이 쏠쏠(?)해서인지 가운데 뚝 잘라먹고 꼭 결말부터 흘리신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잘못 이야기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근래 십 년 넘게 이런 증상(?)을 보이시는 걸 보면 이건 아주 상습범 수준인 듯하다.
-아, 그거 우리나라가 몇 대 몇으로 졌어.
-아, 아부지... 지금 경기 재방송 중이잖어요. 나 일부러 인터넷 기사도 안 보고 지금 이거 보는 건데...! (아, 왜!)
-여기서 삼진이야... 여기서는 홈런이더만.
-아, 아바지.... (아바지랑은 하이라이트를 함께 보면 안... 돼...)
-오, 지금 이 예능에 누가 특별 출연으로 나오나 보다? 뭐 대단한 사람인가?
-아, 그거 그 ○○ 연예인인 것 같던데?
-저기, 아부지... 그 특별 출연자 지금 막, 등장하기 직전이잖아요.. (굳이.... 지금..요??)
주변에서 소소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결말 알려 주기' 증후군에 걸리신 여든 오빠는 '김'을 좋아하신다. 먹는 김 말고 스팀이 나오는 '김.' 그렇게 추측한 이유가 있다. 여든 오빠는 '김새게 하기'와 '김 빠지게 하기'를 누구보다 좋아라, 하시기 때문이다.
-(늙은 아이는, 얼굴 가득 짜증의 표정을 안고) 아니 마지막을 알아 버리면 뭐가 재밌어서 이걸 다 보고 있겄어요!?
-그럼 그냥 알고 보면 되지 뭘 그러냐?
-그럼 보는 의미가 없죠. 다 본 거랑 같은데..!
항의가 짙어지자 어느 날엔 여든 오빠도 슬쩍 성을 낸다. 늘 면박만 당하는 게 억울하셨던 모양이다. 이건 '스포일러 재주꾼'이 처음으로 내는 '화'다.
-(여든 오빠, 약간 머쓱해진 표정으로) 아, 그럼 안 보면 되겠네... -_-
얼마나 면박이 듣기 싫었으면 이런 반응을 보이실까 싶기도 해서 죄송스러울 때도 있다. (아,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구태여 소상히 알려 주시는 저의가 뭐냐구요 --;)
물론... 이 늙은 아이... 계절이 지날 때마다 당신들과 함께하는 이모든 계절이 다 소듕해요, 라고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을 애틋하고도 귀하게 바라볼 때도 있었긴 하다...그런 마음으로 생각하면 이런 '언행불일치'는 몇 번이고 반성하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모순덩어리인 것을... 그저 함께 늙어가고 투닥투닥 부대끼려면...
언행불일치는 삶의 '덤'인 것을...
이 모순의 '덤' 한 스푼을 오늘도 이고 지고 사는 늙은 아이는 오늘도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모든 감정을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에게 맞추느냐, 아니면 나의 감정대로 내지르느냐...
그러나 어찌 보면 이런 갈등도 때로는 감사하다. 칡뿌리 얽히듯 얽힌 모양의 이 갈등조차도 상대가 있어 주기 때문에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군가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도 결국엔 이 모든 갈등이내려주는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 축복을 실천하려는 듯 오늘도 여든 오빠는 스포일러를 발설하려는 입을 자꾸만 달싹거린다. 그런 여든 오빠에게 묻는다.
우리 세 사람, 여든 오빠, 요리 언니, 늙은 아이.
이 등장인물 셋이 출현하는 <함께 늙어가요, 우리> 연재의 스포일러는 어떻게 될까요?
이 연재는 어떤 스포일러는 쥐고 있을까.
우리는 또 어떤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까.
어떤 끝이어도 상관없다. 끝이 꼭 끝은 아니니까. 끝은 어떤 다른 날의 시작일 수도 있다. 봄의 끝은 여름의 시작이고 여름의 끝은 가을의, 가을의 끝은 지금처럼 '겨울로 들어가는 열린 문'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다.
'사계절이 돌고 돈다는 스포일러'만큼 반가운 스포일러는 없다.
우리 그렇게 끝이 아닌, 시작을 향해 함께 걸어가요.
사계절이 돌고 돈다는 스포일러의 축복 안에서,
오늘도 우선 함께 늙어가 봐요, 우리.
(늙는다는 건 어쩌면 의외로 좋을 겁니다. 돌고 도는 사계절의 스포일러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계절 속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는 우리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