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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01. 2024

잔소리가 늙어가요

-아니, 모자를 쓰고 나오셨어야지. 일교차가 심한데!

-됐어. 그냥 가.


여든 오빠, 요리 언니, 늙은 아이. 이렇게 셋이서 아침에 산책을 나서는 길이었다. 평소 추위는 가장 잘 흡수하면서 오늘 여든 오빠는 체온을 지켜 주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제가 다시 올라가서 가져올까요?

-아니. 뭐 하러? 그냥 가.


이래 놓고 잠시 후 춥다고 코를 푸실지 모른다. 요리 언니와 늙은 아이는 아직 집 근처니까 '좋은 말 할 때' 모자 가져오는 일을 허락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끝내 "아, 그냥 가자니까?" 살짝 언성을 높이려는 여든 오빠다. (사실 두 모녀의 등쌀에 늘 들들 볶이는 여든 오빠이긴 하다.)



-아니, 아부지. 계단 내려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시면 어떡해요?


이건 겨울만 되면 늙은 아이가 여든 오빠에게 하는 사랑의 메시지. 손이 시리다고 주머니에 날름 손을 넣어 버리고는 계단을 저벅저벅 위태위태 내려간다. 그 '꼴'이 영 마뜩잖은 늙은 아이다. 저러다 계단이라도 헛디디면 어쩌려고? 늙은 아이 눈에는 그저 여든 오빠가 팔십 먹은, 아니 여덟 살 먹은 어린아이로만 보인다.



-아니, 침대나 의자에 걸터앉아서 양말을 벗어야지 맨날 서서 양말을 벗으셔, 넘어지려고!

이번엔 내 화살이 요리 언니에게로 향한다.


-아니, 그 뜨거운 걸 손을 떡하니 잡아 버리면 어떡해! 또 화상 입으려고!!!

요리할 때마다 따끔한 목소리에 시달리는 요리 언니다. (그러려면 늙은 아이, 네가 요리를 할 것이지, 말만 많은 딸내미다.)



-아, 엄마 엄마. 앞에서 자전거 오잖아. 이쪽 가장자리로 붙어서 걸어.

-아, 엄마 좀 옆으로 가. 엄마 앉은 자리 옆으로 누가 휴대폰을 바싹 뒀네. 남의 물건 괜히 떨어트릴라.



<너, 가만 보면 잔소리, 되게 많이 하더라?>


응? 내가? 언제? 언제?

살다 살다 잔소리 많이 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었다. 살아오며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참았지, 내가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남에게 상처될까 봐 잔소리의 '지읒'도 안 꺼내는 나인데 내가 잔소리를요? 제가요? 언제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잔소리를 했다는 말씀이시지요?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도무지 내가 언제 어떻게 잔소리를 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요리 언니의 저 문장 덕분(?)에 나는 아주 '진소리꾼'으로 호도되고 매도된다. 는 '할 말'을 거지, '잔소리'를  건 아닌데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니 이렇게 추운데 그것만 입고 나간다고?

이번엔 내 목소리가 아니다. 요리 언니의 목소리. '바빠 죽겠는' 출근길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아, 바빠.

-아니 이따 또 춥다고 그러려고?

-...... 밖에 진짜 추워?

-저기 봐라. 낙엽 떨어지고 바람 부는 거.

-그... 그런가? (일교차 크다고 한 것 같은데... 이따 더워지는 거 아니야?)


미심쩍어하면서도 늙은 아이는 귀가 팔랑귀라 요리 언니의 말을 끝내 지나치지 못한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두꺼운 스웨터를 껴 입는다. (그날.... 늙은 아이...  아침에 버스에 타자마자 쪄 죽는 줄 알았다는 후문.)



그나저나 요리 언니의 잔소리를 듣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내 목소리가 잔소리였네!


내 목소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이자 평안이자 사랑의 목소리라 생각했다. 그걸 잔소리로 전환하여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타인에게는 한마디도 못 하면서 집에서는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를 잡도리하는 늙은 아이였던 것.



저기, 여든 오빠,

여기요, 요리 언니...!


늙은 아이도 늙다 보니 변하나 봐요. 조카들한테 하던 잔소리를 이젠 당신들에게 하네요. 잔소리하는 사람이 늙어가다 보니 잔소리 양도 늘어만 갑니다.



그래도, 오빠, 언니!

그렇게 서로 잔소리 왕창 해 주면서,

함께 늙어가요, 우리.



근데... 진소리만 한 보약도 없어요!!!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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