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녀오셨어요?
-어. 동백이라는 역이 다 있더라.
늙은 아이도 동백역을 몰랐다. 전철 노선도에 에버라인(기흥→전대•에버랜드)이 있는 줄도 미처 몰랐다. 여든 오빠는 ROTC 친구들과 모여 식사를 한 후 광역버스를 타고 동백역에 내려 근처 병원에 다녀왔다. 같은 대학 ROTC 동기 가운데 회장을 맡았던 분이 쌩쌩하던 지난날을 잠시 뒤로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고 한다.
-친구분은 잘 계시고요?
-어. 친구는 휠체어 타고 내려왔고. 근데 부인은 좀 말라 보이더라. 간병인 하나 두고 있다고는 하는데.
-다리가 불편하신 거래요?
-정신은 멀쩡한데, 파킨슨병이 좀 와서 다리가 좀 힘든가 봐.
-고생이 넘 많으시겠다.
-그렇지, 뭐. 이제 어디 한 구석 안 아픈 데가 없는 나이고,
다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
누구라도 이상해하지 않을 나이, 라는 말에 늙은 아이는 어딘가 모르게 쿡쿡 쑤신다. 명치끝인지 목울대 넘어 어느 언저리인지. 가시 같은 돌덩이가 찌르르 온몸을 누른다.
-오늘 보고 온 게 마지막이지, 뭐. 언제 또 다 같이 찾아갈 수 있겠어.
여든 오빠의 이 말에 요리 언니와 늙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그분들이 '내일이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서 아니라, 이 계절을 언제까지고 마음껏 누린다는 것은 인간의 손을 벗어나는 영역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ROTC 모임에는 다들 나오셨고요?
늙은 아이는 화제를 돌린다.
-아니. 11명 회원 가운데 한 명은 아프고 한 명은 일정 있어서 9명 나왔어.
-오, 그래도 많이들 나오셨네!
-그럼. 다들 잘 나와. 11명 다 나올 때도 많지.
석 달에 한 번 보던 것을 두 달에 한 번으로 바꿨다. 나이 들수록 모임이 줄고 사람이 줄고 세상의 폭도 줄어든다. 그래서인지 여든 오빠의 여든 넘은 친구들은 국민학교 출석하듯 꼬박꼬박 모임에 잘 나오는 편이라고 한다. 이젠 누가 불러 주는 데도 없으니 더 그런 게 아니겠냐며.
여든 오빠의 전언에 따르면, 친구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총무를 맡은 한 친구가 간병인에게 주섬주섬 돈을 쥐어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내 친구를 잘 좀 부탁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나이 드신 분들이 그 멀리까지 다녀오시느라 수고들 많으셨네요.
-어, 한 친구가 안내를 잘해 줘서 그래도 시간이 덜 걸렸어.
-잘하셨네.
늙은 아이는 오늘의 후일담을 식탁에 내려놓는 여든 오빠 앞에 따뜻한 물 한 잔을 내민다.
어쩐지 오늘따라 이 하루,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올해도 맞이한 이 가을이, 괜스레 감사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감사합니다, 라고 일기장에 끄적인다.
내일이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그 나이는 과연 노년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는 내일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까.
어떤 내일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까, 아니면...
상처가 난 보조개 사과라도 맛있게 먹어 두어야 할까.
그래, 거창하게 사과나무까지 심을 것 뭐 있냐, 사과를 달게 먹으면 그만이지. 늙은 아이는 식사 후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를 테이블에 모은다.
"자, 사과 드세요."
"네. 고맙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커피도 내릴게요. 다이제스트 과자 하나씩이랑 먹읍시다. (난 두 개.)"
"네네. 고맙습니다요."
"네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떤 내일이 오더라도 우리,
아침 식사 후에는 이렇게 사과 한쪽, 커피 한 잔.
서로의 아침을 맛있게 나눠 가지며 그 하루를 살아가요.
오늘 하루,
마음껏 서로를 사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