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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04. 2024

이거, 일이 커지는데?

요리 언니만 만나면 어떤 일이든 '침소봉대(작은 일을 크게 불리어 떠벌림)' 차원이 된다.


"아, 김밥 먹고 싶다."

개천절. 어제 늙은 아이는 단지 이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이따 저녁에 대충 김밥 싸 먹을까? 어제 '개소리'라는 드라마에서 김밥 싸는 거 보니까 김밥 먹고 싶어졌어."

이 한마디를 덧보탰을 뿐이다.

이런 작은 소망들이 '온 가족의 김밥 열망'으로 뒤바뀐 것은 '요리 언니'의 말을 거치면서다.


"그럼 쌍둥이네도 김밥 싸 줄까?"

'응? 그럼.... 제대로 각 잡고 싸야 하잖아?'


쌍둥이네는 늙은 아이의 조카네, 그리고 요리 언니의 손주네를 일컫는다. 늙은 아이는 사실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당근만, 아니 요즘 당근이 비싸니까 우엉과 단무지, 깻잎 등만 대충 넣어서 돌돌 말아 볼까? 평소대로 아주 쉽게 생각했다.


그러나...


"당근 사러 가자."

요리 언니의 말씀. 늙은 아이의 조카 사랑 못지않게 쌍둥이 손주 사랑이 위대, 아니 거대하신 우리의 요리 언니. 그래서 늙은 아이는... 아침부터 난데없이 당근을 볶았다. (볶고 또 볶았다.)



흠.. 이거 점점 일이 커지는데...


"오이도 넣자. 오이 사러 도서관 앞 아파트, 그 채소 아주머니한테 가자."

왔다 갔다 15분은 걸리는 곳으로 우리는 다시 '장 보기 여정'을 떠난다. 요리 언니의 요리 열정은 못 말린다. 채소 아주머니가 꼬드기면(?) 어느새 두 손에 얼갈이배추와 열무 몇 단이 들려 있다. (요리 언니가 장을 보러 가자고 하면 여든 오빠와 늙은 아이는 늘 긴장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김치 담그기' 팝업 행사가 열릴지 모르므로...)


다행히 오늘은 김밥만 하기로 했다. (채소 아주머니가 양배추를 안 팔아서 그렇다. 요리 언니는 급한 '김밥' 일정에도 불구, '양배추 김치 담그기' 계획을 세워 두었던 터다.)


-몇 줄?

-한... 열 줄?


열 줄을 계획하면 최소 12줄은 싸야 한다. 아니 재료 처리를 위해 그 이상을 싸야 할 수도 있다. '요알못' 늙은 아이는, 그저 김밥 만드는 수준밖에  안 되는 요리 실력이라 일이 커지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다. 조카들을 먹이는 것도 좋지만 늙은 아이는 휴일이라 쉬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다. 하지만 요리 언니의 반자동적 요리 습관은 '김밥 나눔'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아무튼 그냥 네댓 줄 정도만 싸 먹으려던 것이.. 열둘, 열셋.. 그 이상을 넘어가게 생겼다.



 자꾸 일이 커진다. 왜일까...

그래, 짝사랑을 하면 일이 커진다.

요리 언니와 늙은 아이의 짝사랑은 평소 이런 문장을 낳곤 한다.



-오, 쌍둥이 조카님(손자님)!

-오, 제발 들러 주세요.

-오, 제발 우리 김밥 먹어 주세요.

-오, 한 말씀만 하소서, 저희가 곧 나으리이이이다...

-여러분을 최고급 품질로 모십니다.

-오, 사랑하소서!


누가 싸 달란 적도 없고 누가 먹고 싶다고 주문을 넣은 적도 없다. 주문서가 없는 사랑은 짝사랑이다. 늙은 아이와 요리 언니는 오늘도 김밥을 빙자해 짝사랑을 둘둘 말아 올린다.



이렇게 두 사람, 팔불출로 함께 늙어 간다. 여든 오빠 사전에 나오는 "짝사랑하지 마러~~"를 격언 삼아야 함에도 우리 두 모녀는 늘 이렇게 짝사랑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어제도 오늘도 짝짜꿍짝짜꿍, 늙은 아이와 요리 언니는 짝사랑 레벨만 잔뜩 올린다.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바로 내가 여기 있는데~~"



그렇게 짝사랑을 하면서..

함께 늙어가요, 우리.



추신) 그날 점심과 저녁, 늙은 아이는 총 16줄의 김밥을 쌌다. 점심도 저녁도 메뉴는 김밥.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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