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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15. 2024

넌 그것도 모르냐?

네, 몰라요

두 번 치면 켜지고

다시 두 번 치면 꺼지고!



-응? 진짜요?

-넌 젊은 애가 그것도 모르냐?(여기서 '젊은 애'는 여든 오빠 기준의 '젊은 ')


의기양양 여든 오빠의 표정. 휴대폰 액정을 두 번 톡톡 건드리면 휴대폰이 켜진다. 다시 두 번 두드리면 그대로 화면이 꺼진다. 늙은 아이는 휴대폰 화면을 켤 때만 적용되는 법칙인 줄 알았다.

그렇다. 정말 그것도 몰랐다. 여든 오빠가 늙은 아이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다시 시연해 보인다. 타닥. 손가락으로 클릭하듯 액정에 노크를 한다. 물 흐르듯 화면이 열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글 프로그램으로 글을 쓰다 한글 창이 작아져서 늙은 아이를 불러 대던 여든 오빠다. 큰 화면으로 되돌아가지를 않는다며 이상하다고. (창 최대화만 하면 되는데...) 여든 오빠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다.



-엥? 또 장을 본다고?

-사태 사려고.

-어제 사셨잖아

-세일하니까 더 사려고. 아니 애들이 그때 육포 먹는 것처럼 사태가 맛있다고 그래서.

-아까 요리하신 것 보니까 사태 많던데? 

-아 근데 이번엔 사태를 좀 쪘더니 너무 흐물흐물해졌어. 혀니가 씹는 맛이 없다고 하겠어~


저기요. 요리를 다 완성했는데도 고기가 안 질겨서 다시 사다가 넣으신다고요?? 진심?


명절 때 음식 장만하느라 등골이 휘실 테이제부터 식당에 가서 먹자고 둘째 딸이 제안했을 때, 첫째 딸인 늙은 아이 또한 쌍수 들고 이를 환영했다.


둘째 : 근데 혹시나, 엄마가 요리해서 우리 먹이고 싶은데 식당 가자고 하는 걸까 봐.

첫째 딸: 무슨 소리, 무슨 소리! 엄니는 힘든데 겨우겨우 하시는 거지!


늙은 아이는 요리 언니를 대변하는 변호인처럼 나댔다. 그런데 둘째네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요리 언니가 하시는 말씀.


-그런데 뷔페 가면 먹을 게 없더라. 집에서 푸짐하게 다 같이 먹는 게 낫지. 


오순도순 한자리에 모이는 것. 그걸 더 원하셨다. 그게 요리 언니의 진심이었다. 그것 또한 몰랐다. 그냥 편한 것이 곧 좋은 것인 줄로 알았다.



늙은 아이는 부모의 속마음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겉모습에 때론 무심하다. 두 달 전부터 나타난 여든 오빠의 이상 징후, 그것도 정말 몰랐다.



-요즘 너희 아빠, 이것을 해도 흥 저것을 해도 흥.

-그러니까~ 아부지가 요새 좀 의지가 없으시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러시고.

여든 오빠, 최근 두 달간 괜스레 창밖만 내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저물어가는 낙엽에 한숨짓고 말을 걸어도 대답이 영 시원찮고.


왜 저러시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혈압 때문인가? 그러나 여든 오빠의 혈압 노트를 훔쳐보니 좀 높긴 해도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오늘 동네 병원에서 초음파를 하고 왔는데 이게 약 부작용일 수도 있다고 하네?


늙은 아이가 모르는 사이 부모님끼리만 동네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간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가슴에 무언가 몽우리가 만져지는 듯해서 이게 혹 큰 병이면 어쩌나 싶으셨다고. 두 달을 끙끙 앓다가 요리 언니에게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동네 내과에 다녀오셨다. 그간 먹던 혈압약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다니던 대학병원에 갔던 날...


-저기, 교수님. 저희 아버지가 혹 여성형 유방증은 아닌...

-아~~  그 약 뺐어요 ㅎㅎ

-네? 뭘?

내가 보호자로서 말을 꺼내자마자, 아니 꺼내기가 무섭게 교수님은 다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환한 표정으로, 해당 약은 뺐다고 다짜고짜 이야기하신다. 알고 보니 혈압약 부작용으로 그간 가슴 두 쪽이 아프셨던 거였다. 진작 알려 주시지,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밝은 표정에 얼마나 안심이 되든지...



그나저나... 늙은 아이, 이렇게 또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만 산다.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오만이었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니 곁에서 외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때로는 좀 버겁고, 때로는 그래서 더 행복하다 여겼다. 철석같이 '난 효녀'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았다. 특히 요즘 '함께 늙어가요, 우리'라는 연재 브런치북을 쓰며, '효녀 코스프레'로 자화자찬이 늘어지던 중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순 맹탕 효녀였다. (아니 여기서는 '효' 자도 빼야 한다.)


그저 여든 오빠가 가을 타는 줄로만 알았다.

그냥 요리 언니가 요리하기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넌 그것도 모르냐?


득의양양, 의기양양. 여든 오빠가 신문물에 우쭐거릴 때도, 두 달간 끙끙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혼자서 건강 염려증에 휩싸일 때도... 늙은 아이는 몰랐다. 부엌에서 오래 서 있으면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손자들 먹일 음식을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연구하는 요리 언니. 이 언니의 내밀한 기쁨(가족 사랑)도, 사실 늙은 아이는 잘 몰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 아이지만

여전히 여든 오빠와 요리 언니는 이 늙은 아이를 데리고 살아 준다.


그래요.

그렇게 이 무지한 딸내미와 함께 늙어들 갑시다.

우리 계속 잘 늙어가 보아요.



*등장인물 간략 소개
1) 여든 오빠: 여든 고개를 넘어온 아버지. 초등학생 대하듯 하나씩 알려 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2) 요리 언니: 초등학생 대하듯 가르쳐 주는 것을 가장 잘하는 편이다. 여든 오빠의 아내.
3) 늙은 아이: 1번과 2번의 반려견, 아니 반려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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