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비키시라니까요. 다쳐요, 다쳐. 아이코, 아주머니!
이건 마트에서 배추를 나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
-자, 이제 준비 다 됐으니까 배추만 사지 말고 머리 끄덩이도 서로 쥐어뜯으셔. 아니, 왜 이렇게 난리들이셔?
이것도 그 마트 직원의 목소리.
요리 언니와 여든 오빠, 늙은 아이. 우리는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헤매고 헤맨 끝에 만난 해남 배추. 해남 배추를 선호하는 요리 언니는 마침맞게 해당 배추를 찾았고, 농식품부 할인이 들어가 한 망(세 포기)에 7,990원으로 해남 배추를 여러 망 구입했다. 1차는 소량으로 구입하였는데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잘라 보니 영 상태가 좋지 않아 실망만 하고 말았다. 우리는 2차 김장을 긴급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모 마트에서는 농식품부 할인에다가 카드 할인까지 더해 한 망에 무려 4,480원! (어제 7,990원에 배추를 구입한 것에 땅을 쳐야 할 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이었다.
"서로 머리 끄덩이도 쥐어뜯으셔. 왜 이렇게 배추 못 사서 안달들이셔?"
마트 직원은 우리를 나무랐다. 하지만 한창 고공행진을 하던 배추 가격이 이 마트에서만큼은 63%나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니, 사람 머리는 쥐어뜯지 않더라도 배추 머리만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배추로 1년 치 양식을 준비하고 싶은 어머니들의 마음을 마트 직원을 잘 몰라 주었다. (김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마음인 듯했다.)
요리 언니와 늙은 아이는 무소의 뿔처럼 배추에 달려들었다. 평소에는 일단 배추 한 망을 우선 사 본다. 마트 밖에서 준비해 간 칼로 배추를 반으로 쪼개 상태를 살핀다. 만족스러운 배추를 골랐다면 해당 장소에서 본격적인 구입을 서두른다. 그러나 세 포기에 4,480원이다. 고르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배추가 사라졌다.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대한민국의 이 치열한 현실을 '김장 배추 구입 작전'에서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추를 싸게 사 왔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 이유는?
두말하기 입 아프다. 김장을 해 보면 안다. 힘.들.다. 더군다나 요리 언니네는 절임 배추를 쓰지 않는다. 생배추를 나르고 자르고 다듬고. 반씩 쪼갠 녀석들을 소금물에 담가 소금물 샤워를 시킨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그걸 하나하나씩 씻은 후 물이 빠지도록 커다란 채반에 담는다. (물론 잠을 설치는 것도 기본. 중간중간 소금이 잘 배었는지 확인해야 하고 배추 이파리 부분에도 소금을 뿌려 줘야 한다. 골고루 소금물을 먹은 배추들이어야 1년을 두고 먹을 귀한 저장 양식이 될 수 있다.)
사실 김장철이어서 힘든 것만이 아니다. 요리 언니네는 늘 김장철 같은 분위기다.
"아니, 이 집 오늘, 무슨 잔치 하시나요?"
쌍둥이 손자들 먹이려고 자발적으로 이 요리 저 요리에 돌입하시는 요리 언니. 고기가 질길까 봐 압력솥에까지 푹 삶으며 정성에 정성을 쏟는 언니다. 그런 요리 언니 입에서 평소 자주 나오는 문장은 대체로 이러하다.
1. 오늘 ○마트 좀 가야겠다.
2. 이따 농협 하○로 마트 가야겠다.
3. ○마트 갔다가 홈○러스도 들러야겠다.
보고 또 보고. 장 보고 또 장 보고. 하루 걸러, 혹은 하루가 멀다하고. 아니, 아니다. 어느 날은 마트를 하루에 두세 군데씩 방문하고, 어제 갔던 곳을 오늘 다시 가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유는? 어제는 없었던 삼치가 오늘은 실한 모습으로 고운 자태를 드러내기도 하니까. 어제는 없었던 할인이 오늘은 푸짐한 할인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니까. (또 11월 초에는 '○데이' 이벤트가 열려서 온갖 물건들이 1+1이거나 50% 할인이었다. 보안 및 경비를 맡으시는 분들이 계산 줄을 삼엄하게 안내해 줄 정도로 사람들이 진짜 많았다. 한때 우리 동네에 있는 ○마트가 전국 ○마트 가운데 매출이 가장 좋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그런 날에도 우리는 빠지지 않고 장을 보았다. 총 3일의 이벤트 기간 중 이틀이나 행차했다.)
그... 그... 만...
늙은 아이가 속으로만 외치는 말이다. 요리 언니가, '나 혼자 먹으려고 장을 보는 것은 아니다'라는 엄포를 한 뒤라 여든 오빠나 늙은 아이는 끽 소리도 못 하고 따라나선다. 때때로 요리 언니는 '장 보는 일'을 '산책하는 일'쯤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꼬드긴다.
"오늘 산책은 ○마트로 가자. 소화도 시킬 겸."
'산책길'이 그대로 '마트길'이 된 지가 오래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김영민 저자의 책에서 '목적이 있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라고 했다던데...)
물론 안다. 장 보는 일은 요리 언니에게도 스트레스다. 당신 혼자만을 위해 하는 일도 아니고 아침 먹으면 점심 오고 점심 먹으면 저녁이 오는 일과는 요리 언니의 머리를 어지러이 뒤흔든다. 이를 눈치채신 여든 오빠, 어느 날은...
여보, ○거킹에서 햄버거 먹고 들어갑시다.
햄버거?
요리 언니의 눈이 반짝인다. 한 끼는 건너뛸 수 있겠다는 기쁨이 요리 언니의 뇌리를 스친다. 게다가 요리 언니, 이 햄버거 가게의 감자를 유독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요. 햄버거 먹어요, 우리.
그렇게 햄버거 먹고 피자 먹고 이것저것 시켜도 먹으면서 살아요, 우리.
그렇게 늙어가 봐요.
(내일은 (제발) 마트 대신 집에서 모처럼 쉴 수 있는 요리 언니네이길 바라며....)
-○마트에서 우리 요리 언니한테 상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늙은 아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