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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있는 살림

살림과 글쓰기의 경계에서

by 서지현

나는 글 쓰는 *살림꾼일까, 살림하는 작가일까?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결국 말의 순서에 답이 있을 것이고 말의 수식을 받는 쪽이 나 자신이 더욱 비중을 두는 삶의 모습일 테다. 주부로서의 모습과 작가로서의 삶. 나는 이 두 가지 역할의 경중을 찬찬히 따져보기로 했다.




나는 글 쓰는 *'살림꾼'일까?


모르긴 몰라도 살림을 돌보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꾸준히 글 짓는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맘에도 없는 살림을 시작한 지 어언 12년. 초반에는 살림의 의미는커녕 그 지향점조차 알 수 없어 좌절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차차 나와 가족의 생활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살림이 지닌 나름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살림의 재미에 빠져들수록 나는 쓰고 싶어졌다. 이렇다 할 전문성은 없어도 누구라도 할 말이 있는 세계, 가치 있다 여기는 생활의 양식과 태도대로 맘껏 살아낼 수 있는 살림이라는 열린 장이 나는 참 좋았다.



살림은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했다. 하얀 모니터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허우적댈 때면 살림의 현장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온종일 활자와 씨름하느라 머리가 뜨겁게 달궈진 날은 부러 오래도록 싱크대 앞을 지켰다. 차갑고 세찬 물줄기에 잎채소를 한 장 한 장 떼어 씻고 수북이 쌓인 밥공기 국공기를 닦아 착착 세우다 보면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았다. 실타래처럼 엉킨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지며 마침내 현실에의 감각으로 돌아오곤 했다. 새로이 쓰고픈 마음과 다시 쓸 힘이 생겨났다. 살림은 글 쓰는 삶의 무게추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살림꾼: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나가는 사람'이 아닌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의 의미로 썼다.




어쩌면 살림하는 '작가'일지 모른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살뜰히 살림을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살림을 글감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소한 집안일 하나에도 진심을 다하는 법을 배웠다. 같은 요리라도 조리 과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음식의 담음새를 한번 더 고민한다. 인스타그램에 한두 줄 괜찮은 글귀를 새기자면 단정한 사진 몇 장 챙기는 일은 필수니까. 짧은 문장의 피드라고 마냥 우습게 볼 일은 아니었다. 시시로 포착한 삶의 단면은 실상 내가 보낸 하루의 응축이었고 하루의 반짝임을 담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건져 올린 한두 문장 고갱이를 뼈대 삼아 한 편의 에세이를 완성해 내곤 했다.



잘 의도된 한 컷 한 컷의 신들(scenes)이 근사한 영화 한 편을 이루듯, 어쩌면 살림도 나름 의미 있고 빛나는 일상, 그 장면 장면의 모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작품의 프레임을 가지고 집이라는 우주를 대하기 시작하면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주하는 일이 늘었다. 이를테면 가구 위에 부서지는 황금빛 햇살이라던가 아무도 모르게 돋아난 초록식물의 연한 새순. 새하얀 벽면을 타고 소리 없이 일렁이는 한낮의 그림자 물결 같은 것들. 아이들 책상 위에 흩뿌려진 지우개 가루와 잘 비워진 그릇마다 어룽진 음식물 자욱까지도. 애써 생활의 미학을 발견하려 들자 가슴이 터질 듯 정겨운 삶의 흔적들이 집안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그 대수로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나는 노트와 펜, 카메라를 늘 곁에 두고 지냈다.





삶과 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삶이 없이는 글이 될 수 없고, 기록해 두지 않은 삶이란 쉬이 휘발되고 만다. '행간을 읽는다'는 말은 결국 문장 뒤에 숨은 저자의 삶을 알아챈다는 뜻일 것이다. 더욱 나다운 글을 쓰기 위해 살림에 진심을 다하고, 제법 괜찮은 주부 노릇을 위해 글줄을 끼적인다. 이쯤 되면 어느 것 하나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하나가 선한 동기가 되어 다른 하나를 견인한다.



나는 밥 짓기와 글짓기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낸다.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살림의 의무를 향해 있을 때가 많다. 맘먹고 빈 노트를 채워 나가다가도 나도 모르게 페이지 한 귀퉁이를 빌어 다음 끼니의 계획을 끄적거린다. 그 와중에 똑떨어진 식재료 한두 개가 떠오르면 즉시 장보기 앱을 열고 물품들을 주섬주섬 장바구니에 챙겨 넣는다. 카페에서 글을 쓰다 인테리어용 식물이 눈에 들어오면 또다시 샛길이다. '저걸 우리 집 화장실 선반에 두면 멋스럽겠다.', '나도 스킨답서스를 물꽂이 해볼까? 얼마 안 가 줄기를 길게 늘어뜨릴 텐데.' 불과 한 시간 전 떠나 온 집안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돌아가 매만지고픈 살림의 어떤 장면이 와인빛깔 커피 위에 동동 뜬다.



그러는 한편 세탁과 청소 중에라도 머릿속은 하얀 종이 위를 배회한다. 주방일을 하다가, 혹은 막대 걸레를 들고 이방 저 방을 오가다 수시로 멈춰 선다. 어떤 글귀나 생활의 단상이 불쑥, 그렇게 예고 없이 끼어드는 탓이다. 그것들은 당장 붙들지 않으면 꺼져버리고 마는 점멸등 같다. 막 떠오른 기특한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입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 습기로 들러붙은 고무장갑을 억척스럽게 떼낸다. 연필과 메모지를 집어들고 포획을 마친 후에라야 안도의 숨이 빠져나온다.





나는 문장이 있는 살림을 산다. 삶의 부족분은 글로 채운다. 오늘도 나는 살림과 글쓰기의 경계 그 어디쯤을 서성인다. 살림하는 작가가 되었다가 글 쓰는 살림꾼도 되었다 한다. 두가지 모습 어딘가에 내가 있다.



부디 마음을 다해 살아낸 오늘의 이야기가 제법 들어줄 만한 문장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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