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메리님(카페 주인장)은 나를 언제나 '작가님'이라 부른다. 손님이 있든 없든 대놓고 '작가님'이다. 글을 쓴다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평상시 쉽게 듣는 말이 아니기에 매번 어색하고 낯이 뜨겁다.
'메리님두 참. 작가 말고 그냥 손님이라 불러요.'
목울대를 막 뚫고 올라오는 말을 결국 꿀꺽 삼키고 마는 건 '작가님'이라 불리는 그 순간만큼은 정신이 번쩍 나는 탓이다. 내가 참 작가였지, 그저 전업주부가 아니고. 청소일 하는 알바생 말고 작가가 내 본캐잖아. 그러고 보면 '호칭'의 효용이란 실로 대단하다. 누군가를 격에 어울리는 말로 불러주는 것만으로 그만의 정체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그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날이 차가워서 오늘은 따뜻한 물로 드릴게요."
메리씨는 커피를 내리기 전에 꼭 물 한잔을 내준다. 보통은 시원한 물인데, 부쩍 썰렁해진 날씨에 손님을 향한 배려가 고맙다. 4천 원 커피값을 지불했다 해서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대접은 아니라고 본다. 손님과 주인 사이 찰나의 대면도 없이 키오스크 앞에서 값을 치른 후 꼭 그만큼의 기계적 대우를 받는 일이 당연시되어 가는 세상이니까.
사실 누군가의 작은 관심과 배려에 크게 대접받는 기분을 느낀 건 청소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한 공간의 미화를 책임지는 일은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는 일이다. 몸집을 불린 먼지 뭉치와 널브러진 물건들 앞에서 '누가', '왜' 같은 질문은 의식적으로 접게 된다. 오물과 찌든 때, 무질서와 방치를 직면하자면 몸을 수그리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순간순간 나를 내려놓고, 또 한없이 낮아지다 돌아와 '작가님' 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찔끔 난다. 거기다 따끈한 물과 음료까지 건네받으면 비로소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풀어지며 가슴이 펴진다.
처음 카페를 만났을 때만 해도 매장 주인과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기를 바랐었다. 그래야만 정말 좋아하는 공간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랬던 바람은 잠시, 메리님의 소탈한 성격과 무심한 듯 말을 걸어와 툭툭 대화의 물꼬를 터내는 그녀의 매력에 나는 곧 무장해제 되고 말았다. 책 두 권을 냈지만은 무명작가로 살아요. 애들 학교에 보내 놓고 두어 시간 카페에 앉아 글 쓰는 걸 낙으로 삼고 살아간답니다. 하는 식의 묻지도 않은 말들을 나는 술술 불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메리님께 선물한 책이 카페 한편에 놓이게 된 날, 카페는 나와도 크게 상관있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막 건네받은 따끈한 물 한잔을 두 손에 꼭 움켜쥐고 한결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눈을 든다. 작고 단정한 선반, 어제와 같은 자리에 저자 서지현의 책 두 권이 얌전히 놓여 있다. 파란색 메인 컬러에 곳곳에 비치된 소품마저 무채색 일색인 공간에서 붉은빛이 도는 두 권의 책이 유독 튄다.
이전 같으면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습관적으로 휴대폰 창부터 열곤 했었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앱을 열어 느슨하고 한가한 시간을 즐기곤 했다. 그러다 보면 귀중한 시간이 뭉텅 흘러가곤 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청소에 힘을 쏟느라 토막 난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댕강 잘려나간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며 아직 남겨진 시간에 무엇을 읽고 또 써야 할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청소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낼 시간이다. 청소의 잔상을 털어내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과 마음의 의지가 필요하다. 고개를 들면 시선이 머무는 것, 매우 익숙하지만 언제 봐도 가슴을 뛰게 하는 두 권의 책이 '지금은 읽고 써야 할 시간'이라는 걸 말해 준다.
매장을 흐르는 재즈의 리드미컬한 선율 위에 메리씨가 손님들과 주고 받는 정담이 다정하게 얹히면 불과 얼마 전 사투하던 불결과 추잡함으로부터 구원 받은 기분이 든다. 이 안온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 글 몇줄 끄적거릴 자유가 허락된 것이 얼마나 애틋한 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