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지현 Dec 20. 2023

제자리 인듯, 제자리 아닌

냉잇국을 끓일 여유와 체력 앞에서

강도 높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수월한 일 몇 가지를 해내느라 몸과 시간을 쪼개는 일이 훨씬 힘이 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벌여 놓은 일들이 정교한 톱니바퀴가 되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바퀴의 축이 되는 스스로가 건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그 바퀴 축에 이상이 생겼다.



하루 한두 시간 알바가 뭐 그리 대수겠느냐 생각했었다. 무심코 TV 앞에 앉아 있거나, 동네 마트를 불쑥 다녀와도, 한두 시간쯤 흘려보내는 일이 매우 우스운 일인데. 그러나 그렇게 가벼이 보내는 시간을 남의 집 일을 맡아 하는 것에 견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짧은 시간일망정 정해진 임무를 수행해 내자면 긴장을 하게 마련이고, 핑계 없이 몸을 놀려야 하는 법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일하는 시간은 이미 내 소유가 아닌 것.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명확한 물질적 보상과 맞바꾸기로 한 때문이다.



한두 시간 알바가 이미 크고 작은 삶의 의무로 빽빽한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 청소가 주요 일과가 되면서 읽고 쓰는 시간은 저녁 늦은 시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취침시간이 늦어지는 탓에 잠은 늘 부족했다. '공용공간 청소'라는 작은 의무를 욱여넣어 새로 세팅한 매일의 삶. 그것에 익숙해지기까지 몸은 여러 차례 홍역을 치러냈다. 수개월째 달고 사는 기침은 숙명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오른쪽 눈꺼풀에 툭하면 다래끼가 붉어졌다. 다래끼가 잦아들 무렵 눈곱이 끼고 눈알 전체가 벌게지는 일이 생겼다. 태어나 아데노 눈병을 다 앓게 된 것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아데노만 단독으로 오면 한 일주일 심할 거고요, 감기에 동반하면 조금 덜해요. 약을 쓴다고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의사의 소견이 있은 지 얼마 안 있어 예언처럼 찾아온 감기. 평소대로 주방에 서서 커피를 내리는 중이었는데 일순간 쎄하고 좋지 않은 기운이 뒷목을 타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은 오한과 두통에 나는 힘 한번 못 쓰지 못한 채 잠의 기운에 빠져들었다.



몰려오는 잠은 성난 불길처럼 무서운 것이었다. 방바닥과 한 몸이 된 몸뚱이는 그간 못 잔 잠을 다 찾아 먹으려는지 다른 의지라곤 없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겨우 정신이 든 건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이 나직이 엄마를 불렀을 때였다.

"엄마, 우리 저녁 뭐 먹으면 돼요?"

"저녁? 식탁 위에 있는 고구마에 김치 올려 먹던가..."



가족들에게 저녁을 지어 먹인다는 건 사치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고구마에 김치 어쩌고 저쩌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식어빠진 고구마라도 김장김치 몇 쪽 찢어 올리면 얼추 저녁 요기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해낸 자신이 무척 기특할 정도였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냉잇국을 끓인 일이었다. 김치냉잇국은 마음 먹는다고 뚝딱 끓어 나올 수 없는 큰 정성과 시간이 드는 음식이다.



흙먼지로 심란해 뵈는 냉이를 일일이 다듬었다. 며칠을 앓느라 손질 시기가 늦어지면서 그새 누런 잎이 진 것이 속상했다. 몇 번이고 수돗물살을 타야 하는 냉이 세척도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냉이 뿌리는 따로 잘라 절구공이로 찧어 빻았다. 정성스럽게 멸치육수를 우리고, 잘 익은 김장김치도 쫑쫑 썰어두었다. 더 개운한 국물맛을 내고 싶어 가을무 푸른대를 채 썰어 준비했다.



몇 끼니 밥다운 밥을 못 얻어먹은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주방에서 피어오르는 푸짐한 김에 얼굴이 펴졌다. 아들은 세상에서 냉잇국이 제일 맛있다고, 냉잇국이야말로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라며 날것의 기쁨을 드러냈다. 뿌리째 푹 고아 끓여낸 냉잇국을 한 그릇 먹고 나면 나 역시 한결 기운이 날 것 같았다. 번거로운 조리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아끼고 소중히 하는 나의 자리로. 다만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제자리 인듯 제자리 아닌 삶. 소소한 변화일망정 나는 날마다 변태를 원한다. 근육을 찢지 않으면 근사한 몸을 만들 수 없듯 삶을 찢지 않으면 꿈에 한 발 다가갈 수 없다. 삶을 찢는다는 건 벗어나는 일이다. 곱게 머물던 일상의 틀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안정과 평안을 보장해 주는 삶의 루틴으로부터 기꺼이 멀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나를 부인하고 일상의 반경을 넓히느라 크고 작은 진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늘이 한 꺼풀 벗어진 듯 몸이 가벼운 오늘, 새 냉잇국을 끓일 수 있는 체력과 여유 앞에서 나의 제자리를 소중히 한다.



이전 07화 카페지기와 작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