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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현 Jan 06. 2024

저는 커피값을 버는 작가입니다.

글과 환기

'딱 커피값만' 벌자고 시작한 일이었다. 앞서 밝혔듯 내게 있어 커피는 글쓰기의 은유요, 하루 한 잔의 커피값은 글쓰기를 가능케 하는 최소의 비용이자 연료였다. 커피값을 벌기 위해 알바를 뛰겠다는 결심은 돈 되지 않는 글을 쓰면서 시간만 축내고 있다는 무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다.



고로 일하는 시간은 하루 한두 시간이면 족했다. 지금은 여러 시도 끝에 파티룸과 여성전용고시텔, 두 곳의 공용공간에서 청소일을 한다. 물론 애초 계획대로 시간 조절이 잘 되지 않는 날도 있다. 순전히 파티룸 때문이다. 근무 조건이 일정한 고시텔과 달리 파티룸은 일하는 요일과 시간, 이 모든 게 가변적이다. 비수기에는 일주일에 한두 건 청소가 있을까 말까 하지만 성수기(주로 크리스마스 시즌과 연말, 연초, 그리고 휴가철)에는 거의 매일 손님이 찬다. 모임의 성격과 손님의 특성에 따라 뒷정리 수위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무시 못한다.



그런 탓에 어떤 날은 종일 청소만 하게 되는 날이 있다. 아침나절 심하게 어질러진 파티룸을 정리하고, 오후에 고시텔에 들렀다 돌아오면 다시 집안 정리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커피값을 넘어 디저트 값까지 벌고 있군.' 요샛말로 '현타'가 오며 급격한 피로가 몰려온다.        





그럼에도 나의 한두 시간 알바가 불러온 파장은 컸다. 일단 그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집안일에 동참시키는 동력이 됐다. 처음 청소일을 하겠다 나섰을 때 눈을 동그랗게 떴던 남편은 이미 훌륭한 살림 조력자다. 그날의 눈빛은 마치 '뭐가 부족해서?',  아니 어쩌면 '애들 돌보고 살림하면서 글 쓰는 지금 삶만으로도 벅차지 않아?'쯤을  말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내가 택한 삶의 양식을 긍정하며 남은 집안일을 거두어 준.



"엄마, 집안일은 우리가 알바로 하면 어때요?"

집안일 알바는 기특하게도 두 아이가 먼저 제안해 온 일이었다. 엄마가 피곤해 보이니 저희들이 집안일을 대신하겠다는 것이었다. 집안일 항목에 대한 급여도 스스로 정했다. 바닥청소 500원, 설거지 500원, 빨리 널기와 개키기 300원, 이불 개기는 한 점당 100원... 나름 일의 난이도를 고려해 정한 금액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노트 한 권을 마련해 그날그날의 노동과 금액을 적기 시작했고 매 주말 비용을 청구했다. 알바를 하느라 알바를 쓰는 형국이 어쩐지 재미났다. 그리고 그것은 늘 시간에 쫓기는 내게 정말이지 실질적인 도움이었다.



이밖에도 나의 알바가 불러온 삶의 변화는 소소하지만 제법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하루의 시작이 빨라졌다. TV 시청을 끊었다. TV라 해봤자 좋아하는 밤 예능을 한 주에 한두 편 챙겨보는 정도였지만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드는 편을 택했다. 일하는 곳을 오가기만 해도 만보는 거뜬히 채워 걸었다. 몸의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나는 이전보다 활기차고 쾌활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달라진 삶의 패턴으로 작은 진통을 겪느라 한 차례 흠씬 앓고 난 뒤엔 몸과 마음이 단단해진 느낌이다. 청소의 잔상을 지우느라 오래도록 애를 먹는다던지, 기운이 달려 중간에 잠시 드러눕는다던지 하는 일 없이 청소에서 읽고 쓰기로, 또 살림으로 비교적 쉽게 삶의 장면을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글 쓰는 카페에 앉아 당당한 마음으로 커피를 주문할 수 있게 된 것, 더불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나의 '계속 쓰는 삶'을 바라볼 여유를 얻은 것이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 그것이 일으키는 파문과 같은 기분 좋은 변화들이 내 삶에 일고 있다.

 




용을 써도 글쓰기는 어찌 돈이 안 될까 혼자서 끙끙 앓던 날들이 있었다. 글 쓰는 재능이 내게 있기나 한지 자주 물었고고, 출판 시장의 형국을 탓하기도 하면서 쌓여가는 의문과 답답함을 속으로만 삭였다. 이 모든 게 일상을 환기하는 일이 '계속 쓰는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는 과정이었을 게다. 글쓰기란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동반하는 작업이다. 정신 환기에 자주 신경 쓰지 않으면 삶은 고립되고 글은 정체된다. 앉아 있는 시간이 늘수록 고민거리가 늘고,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쓸 거리가 생긴다.



태교 하듯 예쁘고 좋은 것들만 보고 듣고 누린다면 고상하고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오히려 서툴고 모난 일상을 살아내며 마주한 것들을 하얀 자판에 얹어 자꾸만 문장을 둥글리다 보면 가끔은 반짝이는 진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청소일을 하면서 나는 막힌 변기도 잘 뚫고, 어마한 난장판도 단숨에 해치워 내는 씩씩한 아줌마가 되었다. '누가', '왜'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할 일이라면 일단 팔을 걷어붙이는 사람이 되었다.  



긴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글이 나오진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힘껏 살아낸 후엔 단 일이십 분의 여유뿐이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쓸 수 있다. 허황된 욕심은 내려놓게 되었다. 완벽한 삶은 없기에 완벽한 문장도 없다는 마음으로.



문장을 매끄럽게 하기보다 매 순간 삶에 진정성을 더하고 싶다. 어쩌면 그것이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쓸 수 있는 비결일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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