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수가 있다. 친구 사이에서 연인이 되는 경우다. 불타는 감정으로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름 진한 사랑이다. 우선 서로에게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다. 두 사람을 두르고 있던 우정의 표피를 하나 둘 까내려나가는 묘미 또한 클 것이다. 게다가 쉽사리 식지 않는 사랑이다. 우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정이야말로 충실한 시간의 무게를 견뎌온 값진 결과물이니까.
운동을 문득 애정의 대상으로 비유하고 싶어진다. 줄넘기는 내게 있어 친구일까, 연인일까?
유년 시절, 줄을 자주 가지고 놀았다.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줄을 가지고 놀던 기억이 많다. 대개는 줄을 넘으며 '꼬마야 꼬마야'를 불렀다.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발목, 무릎, 허리와 가슴 등으로 줄을 높여가며 묘기를 부리는 놀이가 한창이기도 했다. 줄넘기는 재미의 일종이었다.
그 와중에 줄넘기에 관한 기억 하나가 선명하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즐거운 기억이다. 4학년 때였던가. 교내 줄넘기대회에 반 대표로 나가 400여 개의 줄을 넘어 1등을 차지했었다. 아이는 질끈 뒤로 묶은 말총머리를 유유히 흔들며 당차게 줄을 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한 번에 수백 개의 줄을 넘기가 쉽지 않은데 어찌 그런 기록이 가능했는지 생각할수록 모를 일이다.
줄넘기를 손에 쥔 채로 상급학교에 진급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줄넘기를 권장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줄넘기가 체육 실기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것도 1학년에서 3학년까지 전 학년에 걸쳐 줄넘기를 주요 종목으로 다뤘다. 하여간, 줄을 제대로 넘지 않고서는 입시의 벽을 제대로 넘어설 수가 없었다. 즉 줄넘기는 입시생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었다.
대학은 기대와 달랐다. 나를 단단히 조여주던 줄이 탁 풀린 것만 같았다. 번잡한 대학생활 가운데서 자주 헛헛함을 느꼈다. 이른 새벽이나 한밤중에 학교 대운동장에 올라가 줄을 넘거나 너른 운동장을 돌았다. 줄넘기로 경직된 근육을 운동장을 돌면서 풀었다.
다른 운동을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대학 교양 수업으로 수영을 택했다 그러나 키가 훌쩍 큰 남학생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수영을 배우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한 학기 내내 위축된 마음에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수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피트니스를 시도한 적도 있다. 다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구르는 트레드밀, 그 전동의 무자비한 굴레에서 무력함을 느꼈다. 기구를 이용한 운동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그 후 중등 교사가 되었고 첫 근무지인 부산으로 가 머물게 되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였다. 가족처럼 따뜻한 교직원 동료와 함께였지만 마음의 밑바닥엔 늘 외로움이 깔려있었다. 특히나 주말이면 적적함이 더했다.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에 혼자 자취방에 머물거나 시내를 떠돌아야 했으니.
할 수 없이 줄을 넘었다. 땀에 젖도록 실컷 줄을 넘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친구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난 뒤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체력이라도 제대로 비축해두자는 심산도 있었다. 근무했던 학교가 자립형 사립이었다. 나같은 초보 교사에게는 근무 여건이 녹록지 않았었다. 잘 버티려면 얼마간 몸관리는 필수였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줄넘기는 유용한 운동이었다. 어린아이가 잠든 틈을 타 마당에 나가 얼마든지 줄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 줄넘기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집에 갇혀있거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수 없는 때에 줄넘기만큼 접근성 좋은 운동은 또 없었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도전의 시기마다 줄을 넘어왔던 것이다. 마치 어려운 시기마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처럼. 줄넘기가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충고 일색을 건넨 적은 없었다. 그저 나와 같이 놀고, 내 한숨을 받아주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을 뿐이다. 줄넘기는 그런 고마운 존재였다.
친구는 어디까지나 친구일 따름이다.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인에게만은 속을 내보일 수 있다. 잘 보이고 싶어 자신을 더욱 살뜰하게 돌보게 된다.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넘나들면서 '나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들여다보게 된다.
줄넘기와 나, 아무래도 우리는 진한 우정에서 사랑 어디쯤으로 가는 길목에 와있는 것 같다. 경험치로 보건데 줄넘기가 없이 버틸 수 없는 인생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