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아귀에 들려있는 줄넘기는 20년은 족히 더 됐다. 본격적으로 줄을 넘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쓰던 것이니까 따져보면 그렇다. 요즘은 김수열 줄넘기네, 홍짐 줄넘기네 하며 가볍고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의 제품이 많이 나오지만, 내것은 원목 손잡이에 가죽 비슷한 줄이 달린 상당히 무게감이 있는 줄넘기다.
줄넘기를 여태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게 나로서도 신통하다. 손때를 묻혀가며 공부했던 수험서는 전혀 미련이 남지 않아 입시를 치른 날 바로 내다버렸다. 정작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었던 나의 오랜 벗, 문방사우는 대학 시절 자취방을 몇 차례 옮기는 사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반면 줄넘기는 애초에 간직하려는 마음조차 없었다. 특별히 애착을 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애지중지 물건을 잘 간수하는 축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2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 동안 내 손아귀를 떠나지 않은 게 의아할 따름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 양, 마치 제가 내 몸의 분신이라도 된 듯이.
내 손아귀에 들린 줄넘기는 기억 속 한 소녀를 자주 소환해낸다. 머리채를 끈 하나로 질끈 묶고 독하게 줄을 넘던 한 명의 여고생이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을 먹고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운동장에서건 복도에서건 이를 악물고 줄을 넘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예 체육복으로 갈아입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줄넘기를 염두에 두고 그랬을 것이다.
이를 악물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학년별로 어느 시기가 되면 예외 없이 줄넘기로 체육 실기를 치렀던 것이다. 모아 뛰기는 기본으로 깔고, 이중 뛰기 개수로 점수를 매겼다. 1학년은 이중 뛰기 10개, 2학년은 20개, 그리고 3학년은 30개 이상을 넘어야 실기 만점이었다. 내신에서 실기 평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지 않았다.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딱히 다른 이유나 목적은 없었다. 오직 실기 만점을 위해 악착같이 줄을 넘었다. 다만 줄넘기로 적당히 땀이 오르고 나면 뻣뻣하고 경직된 목과 어깨가 풀어졌다. 그 덕에 공부가 잘된다는 느낌은 있었다.
어쩌면 공부도 줄을 넘는 식이었는지 모른다. 명문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일념 외에 인생의 구체적인 꿈은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수험 생활에서 성공하면 훌륭한 그 무엇이 될 줄 알았다. 특출나게 잘하는 과목도, 그렇다고 심하게 뒤쳐지는 과목도 없었다. 성실이라는 무기 하나가 전부였다. 요령도 피울 줄 모르고 자리를 지켜가며 전과목에서 적당히 훌륭한 점수를 받아낼 줄 아는, 나는 그런 학생이었다.
어느덧 줄과 함께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고생은 그때의 바람대로 '대단한 그 무엇'은 되지 못했다. 그저 일개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여전히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꾸역꾸역 줄을 넘고 있을 뿐이다. 살을 빼겠다던지, 어느 부위의 근육을 어떤 모양새로 다지겠다는 다부진 목적을 가지고 줄을 넘는 게 아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앞날에 대한 살풋한 기대감만은 여전하다. '그 무엇'을 향한 일념 말이다. 아줌마는 오늘도 줄을 넘으며 속으로 궁싯거린다. '시답잖아도 좋으니 이제라도, 그 어떤 것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일념은 조금 더 간절해진 듯하다.
줄을 넘을 때마다 줄넘기 줄이 삐걱댄다. 손잡이와 줄의 이음새가 녹슨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베어링이 좀 떨어진다. 주위에서는, '요즘 이런 줄넘기는 찾아보기도 힘들다'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어딜 가면 이런 줄넘기를 살 수 있느냐'라고 물어오는 사람은 없다. 아무래도 속으로들 고물 취급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나는 나대로 속으로 이렇게 대꾸한다. '이거 고물 아니고 빈티지요. 좀 삐걱대긴 해도 꽤 쓸모가 있어요. 어딜 가도 살 수 없을 걸요. 아무나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이거 이래 봬도 세월을 넘어온 줄넘기란 말이요. 상당한 세월의 무게를 견뎌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거라니까요.'
20년이 더 된 줄넘기만 빈티지가 아니다. 삶도 빈티지다. 지금 줄을 넘는 아줌마의 일상이 오래전 한 소녀의 꿈과 삶에 맞닿아 있다. 기억 속에서 빛바랜 듯 희미해진 지난날이 오늘을 만나 안녕하느냐고 안부를 물어온다. 내 손 안의 줄넘기가, 그리고 지나온 세월이 여전히, 충분히 가치롭다. 나는 오늘도 묵묵히 세월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