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방, <카페 여기>

우리 동네 이름은 대학동인데

by 서지현
대학동 카페, <카페여기>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는 동안 때때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창했다. 그것이 내게는 ‘성공적인 육아를 위해서는 부모가 오롯이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로 읽혔다.



이쯤해서 '나만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그것은 곧 대학동에서 찾은 카페, <카페 여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태양놀이터를 마주하고 예쁘게 자리한 카페, 그곳은 대학동 카페 순례 끝에 찾아낸, 감히 말하건대 나의 인생 카페였다.



‘커피 배우러 일본에 다녀오겠습니다.’

<카페 여기>가 날 처음으로 응대한 건 카페 출입문에 붙은 손글씨 알림글을 통해서였다. 카페 주인장이 커피 선진국을 답방해 커피를 배울 정도로 열정 있는 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끌렸다.


'학생 손님이 대부분이라 커피값을 비싸게 칠 수 없는 이런 동네에도 무림의 고수, 커피 장인이 존재할지 몰라.'


혼자만의 생각에 괜시리 가슴이 두근댔다. <카페 여기>와 첫 정분을 맺은 날이었다.







예상대로 카페 주인장은 커피에 부심이 있는 분이었다. 커피 맛에 있어서만큼은 높은 수준과 원칙을 고수하는 탓에 직접 커피를 내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머신을 분해해서 청소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커피 미분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커피 맛이 탁해진다는 것이다. 새 원두를 들이거나 신 메뉴를 개발하는 날엔 카페에서 밤새 테스팅을 하고 손님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잠을 청한다. 커피를 건넨 후엔 첫 모금을 들이켜는 손님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핀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피어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그만큼 커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카페는 이렇다 할 인테리어 소품 하나 품지 않았다. 노란 나트륨등과 농도 짙은 원목 테이블만으로 채워진 공간이 묵직했다. 벽면 귀퉁이 ‘고민 끝’이라 쓰인 캘리그래피 액자 한 장이 벽장식의 전부. 그 글귀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고민 끝... 고민 끝...' 나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다보면 커다란 주문에라도 걸린 듯 마음이 개운해졌다.



<카페 여기>는 음악에 자신 있는 카페였다. 길거리에서 쉽게 들리는 유행가가 아닌 누군가의 독특한 취향이 묻어나는 인디음악이 매장에 깔렸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무엇에든 몰입을 돕는 음악이었다. 신기하게도 책을 읽거나 작업에 집중할 동안에는 전혀 의식되지 않다가도 집중 모드에서 막 빠져나오자면 태연하게 이어지던 선율. 긴장의 끈이 기분 좋게 탁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때때로 그가 내려준 커피를 추억한다




“라떼 한 잔 주세요.”

그날도 나는 주인장의 손맛이 가득 깃든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드르륵드르륵’

얼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콩이 갈리면 비로소 오감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내 터져 나오는 에스프레소 향의 강렬함이 공간을 메웠다. 커피 추출과정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건 작고 아늑한 공간이라 가능했다.



주인장은 갓 내린 커피를 건네며,

“바로 드셔야 가장 맛있습니다.”

하는 말을 건네곤 했다. 라떼 맛을 가장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뜻한 것이리라. 그런데 잔에 입을 대려는 찰나 급한 전화가 걸려온 것. 통화를 끝내고 나자 예상대로 우유 거품이 푹 꺼져 있었다. 주인장은 어느새 새로 내린 커피를 내오고 있었다.

“커피가 오래되어 맛이 없게 되어서요.”

그의 세심한 배려로 맛본 커피의 새삼 깊은 풍미,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순간이었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커피 한 잔에 온 힘을 쏟는 걸까? 커피 제 값을 받기도 힘든 이런 동네에서, 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즈음 지인을 통해 주인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소설가 고 박영한의 아들로 등단을 위해 글을 써온 이력이 있다고 했다. 글쓰기와 커피, 어쩌면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정한 기준치에 미치지 않고서야 결코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것들. 타인의 시선과 평가보다 자기만의 궤도를 좇아가는 일이 철저히 우선인 영역, 어쩌면 그런 것들이 아닐까.




때때로 나의 공간 <카페 여기>를 찾아 숨을 골랐다. '고민끝'이라 적힌 캘리그라피 앞에서 긴장을 풀었고, 또 어떤 날은 농도 진한 카페 음악에 마음을 묻었다. 무엇보다도 커피 장인이 손수 내려주는 커피 한 잔에 남은 하루를 살아낼 기운을 얻었다. 출산 이후 한글도 까먹을 참에 책장을 넘기는 기쁨을 되찾은 것도, 몇 자 글줄을 다시 끄적거리게 된 것도 모두 그 즈음의 일이었다.


꼭대기 집에 머무는 동안에는 물리적 이유로 카페를 자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산의 시기는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다. 우리가 머무르던 신선계, 꼭대기 집을 떠야 할 명분이 생겼다. 꼭대기집에서 내려오기만 한다면야... 나만의 공간 <카페 여기>에서의 본격적인 된장질이 시작될 참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