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깨고 보니 몸과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대체 어디인지 잠시 감을 잃었다. 돌 된 아이를 낮잠 재우면서 뜻하지 않게 잠에 곯아떨어졌던 것 같다. 아이가 자는 틈에 끼니를 준비했어야 했다. 밥때가 지난 아이는 이미 깨어 울고 있었다.
배가 고픈 건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깊은 잠으로 그나마 남은 에너지마저 써버렸는지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몸속 세포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 대책 없는 상황을 어이할꼬.
그때였다. 똑똑.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누구세요?"
"애기 엄마, 문 좀 열어봐요. 호박죽 한 그릇 가져왔어요. 간이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뜨실 때 애랑 같이 먹어봐요."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커다란 스텐 우동기에 호박죽 한 그릇을 불쑥 내미시는 게 아닌가.
"이 귀한 것을요..."
"늙은 호박이 워낙 커서 한번 끓였다 하면 들통이에요. 실컷 먹고도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한테도 돌아갈 양이되네."
라고 말씀하시며 후덕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호박죽은 내게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이 방황하고 있을 대 여호와가 하늘에서 날마다 내려준 기적의 음식)나 다름없었다. 몸속 허기뿐 아니라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는,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음식이었다. 그 온기를 아직 잊을 수가 없다.
밀가루를 풀어 끓인 호박죽
어릴 적 할머니께서 끓여주신 호박죽은 부드럽지도 찰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적당히 여물고 쫀득한 알갱이가 씹히는 맛이 좋았다. 찹쌀이 귀하던 시절, 찹쌀가루 대신 밀가루를 넣은 것이 맛의 비결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한 번씩 할머니의 호박죽이 그리울 때면 일부러 밀가루를 풀어 죽을 쑨다. 분무기를 이용해 밀가루에 물을 살포시 적셔 포슬포슬한 밀가루가 몽글몽글해지도록 만져준다. 가루가 날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 밀가루 반죽을 조리의 마지막 과정에 넣어준다. 밀가루 알갱이가 푹 무르도록 잔불에서 뭉근하게 끓여준다. 불을 끄고 난 후 냄비 뚜껑을 덮어 뜸을 들여주면 틀림없다.
어린 시절의 밥상을 추억해 보건데 고기를 씹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이라 그랬던 것 같다. 다만 거칠고 투박했던 호박죽, 그 안에 숨어있는 밀가루 알갱이를 만족스럽게 씹어냈던 감각이 아직 혀끝에 머물러있다. 나름 별스럽고 소중한 맛의 추억거리다.
호로록호로록 목으로 쉽게 넘어가는 죽이 아니었다. 입안에 집히는 밀가루 알갱이를 야무지게 씹어내야 했다. 알갱이를 씹어내며 그날의 이야기도 함께 씹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푸근한 대화가 한없이 이어졌다. 죽을 삼키는 동시에 소화가 되는 느낌이었다. 호박죽 한 그릇을 비워내고도 아쉬운 마음이 들면 맘 편히 한 그릇을 더 청했다. 그러고도 부담이 가지 않는 속 편한 음식이었다.
찹쌀을 풀고 팥을 넣어 호박죽을 끓였다.
팬데믹으로 가족이 밥상에서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늘어간다. 정성을 다해 차린 한 그릇 밥상이 더욱 고맙고 소중한 날들이 이어진다. 문득 호박죽이 끓이고 싶어졌다. 삶의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뜻이겠지.
호박죽 한 그릇에 하루치 힘을 얻는다
힘든 작업이지만 놀이삼아 아이들과 함께 늙은 호박을 다듬었다. 믹서에 곱게 갈아낸 찹쌀과 미리 삶아둔 팥을 넣어 매끈한 호박죽을 끓였다. 창가로 스미는 겨울철 한 줌 햇살에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첫 끼를 나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호박죽의 온기에 오늘을 살아갈 하루치 힘을 얻는다.
눌은 호박죽의 별미를 아시는지
냄비 바닥에 호박죽이 눌었다. 조리의 정도를 조금 넘어선 눌은 죽이 특별한 맛을 선사한다. 지금 우리 넷의 관계가 이와 같지 않겠는가. 그간 해오던 것보다 더욱 밀착되어 서로가 서로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 다행히 우리는 아주 타버리지 않고 도리어 더욱 구수하고 차지고 깊은 맛을 내고 있는 중이다.
나무 주걱으로 눌은 죽을 닥닥 긁어낸다. 평소 누룽지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식구들이다. 그러하기에 눌은 죽은 어느 한 사람의 차지가 되지 않고 두서너 숟가락씩 사이좋게 고루 돌아간다. 눌은 죽이 우리 사이를 더욱 공고케 한다. 여기 호박죽에 관한 맛의 추억 하나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