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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Sep 28. 2022

Oh my english

영어 /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건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입과 귀가 꽉 닫혀 있다. 그렇다고 살면서 뭐 그렇게 특별히 불편하진 않았다. 그동안 만난 영어 시험은 벼락치기 때웠고, 여행에서 필요한 영어는 적당히 말하면 대충 알아듣더라. 중요하고 민감한 의사소통은 물론 남편이 맡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여행 중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처음 보는 외국인과 시답지 않은 대화 같은 걸 자연스럽게 나누고 싶다. 성격은 되는데, 영어가 안된다. 영어가 유창해지면 내 여행이, 내 인생이 훨씬 더 풍부해질 것 같았다.


비겁한 변명인 줄 알지만, 이건 다 중학교 때 만난 영어 선생님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웠다. 알파벳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입학 전에 2달 다닌 학원에서 처음 접했다. 무슨 80년대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자란 시골마을에선 다들 그랬다.


알파벳과 영어 단어를 조금 배우고 들어간 중학교에서의 영어는 암기 과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0살 넘은 영어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쳤다. 교학사 영어 교과서를 썼는데, 시험 문제는 자습서를 달달 외우면 되었다. 적당히 암기해서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았다. 암기과목 영어에 재미란 게 있을 리 없. 한자 외우는데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모의고사를 보면 적당히 성적이 나왔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영어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영어가 재미있는 거다! (이 선생님 수업 잘하기로 유명했다.) 진짜 'Oh my God!'이었다. 영어를 즐겁게 배울 수 있다니 지난 중학교 3년이 너무 아까웠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차저차 1학년 때는 분반 수업을 시작하는 바람에 그 선생님과 인연이 없다가 2학년이 되어서야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영어시간이 기다려졌고, 재미있었다.


그 선생님께 배운 팝송은 여전히 가사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집트 왕자 OST 'When you believe'를 들었을 때의 감동 같은 것까지 말이다.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설명해 주셨고 접두사나 접미사 등을 붙여 수십 개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나는 이런 걸 고등학교 때 알았다). 영어가 그냥 달달 외우는 과목이 아니란 걸 처음 알았다. 어떻게 하면 영어 듣기 평가를 잘 볼 수 있는지도 그때 깨닫게 되었다. 영어가 재밌어진 뒤로 매일 아침 6시에 굿모닝팝스를 들었다. 2년여간 그랬다. 딱 고3 때까지의 일이다.  그 뒤로 당분간 내 인생에서 영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시 영어 공부를 한 건 대학교 4학년 때 토익공부를 하면서 부터다. 그때도 적당히 외워서 적당한 점수를 받았다. 4학년 2학기를 남겨두고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지만,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는 가봐도 별거 없다고 말렸다. 그 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원서에 쓸 OPIC 시험 점수를 볼 때도 스크립트를 전부 외워서 시험을 봤더니 적당한 점수가 나왔다.


그런 내가 다시 영어를 마주하고 섰다. 초등학교를 다니 첫째 아이의 영어를 고민하면 서다. 엄마들이 다 그렇듯, 내 아이는 나와 달리 영어로 소통하는데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고 그것으로 아이의 세상이 넓어졌으면 좋겠다. 원한다면 외국에서 사는 것도 좋지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몇 번 영어 교육의 유혹이 있었지만, 한국말로도 낯선 환경은 딱 싫어하는 아이의 성향과 '커서도 할 아이는 다 한다'는 개천에서 용 날 적 이야기를 하는 남편 얘기에 서두르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수준과 상관없이 영어가 재미있다고 말한다. 일단 그거면 됐다.


그다음은 내 차례다. 언제까지 매년 초 영어공부를 목표로 세우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난 미국 여행 때 5살짜리 아이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들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어천재 조승연이 말하길, 딱 3년만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누구나 그 언어를 할 수 있게 된다는데 정말일까?(3년 동안 시간과 노력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뭐든 되지 싶다.)


얼마 전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 감독상을 받는데, 어쩜 또 황동혁 감독이 영어도 잘한다. 봉준호 감독도 잘하고, BTS RM도 잘하고, 윤여정도 잘하고, 파친코 선자 역의 김민하도 잘한다. 맨날 운동하는 김종국도 잘하고, IVE 장원영도 잘한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건가?


아이 귀가 트일 때 내 귀도 좀 트였으면 좋겠다. 아이 입이 트일 때 내 입도 좀 뻥 뚫렸으면 참으로 좋겠다. 적어도 여행 다닐 때 엄마는 영어 잘 못하니까 네가 물어보란 소리는 정말 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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