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기타리스트] 파블로 피카소
이 또한 지나간단다.
청색시대라 하면 청춘, 푸르고 맑은 시기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푸른색의 색감은 언제나 밝은 얼굴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때로 그것은 차갑고 고요하며, 말로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심해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이면의 푸른색을 가장 깊이 붙잡았던 사람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20세기 초, 피카소는 한동안 세상을 푸른색으로만 그렸다. 이 시기는 그의 ‘청색시대’라 불리게 된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어딘가를 바라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색은 차갑고, 장면은 가난하며, 그림 전체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고독이 고여 있다. 이는 단순한 화풍의 변화가 아니라, 한 예술가가 상실과 고독을 통과하던 시간의 기록이었다.
청색시대. 누구에게나 청색시대는 있다. 내 청색시대에 나는 열 살 때부터 목표로 삼아왔던 마지막 계단을 포기했다. 과로와 갑작스레 찾아온 불운에 몸은 고갈되었고, 16년을 함께 한 반려견마저 세상을 떠났다. 사랑은 있었지만 수중에는 돈이 없던 시기. 어려워진 집안형편 속 스승 이외에 누구도 지지해주지 않았던 공부 앞에서 나 스스로도 작아졌고, 결국 박사과정을 자퇴했다. 이십여 년 동안 붙들고 있던 목표를 내려놓고 나니, 한동안 세상은 참으로 무료했다. 겨냥할 화살도, 달려갈 종착점도 없었다.
학교에 갈 때마다 꿈으로 가득했던 한강의 생기 있던 푸름은 어느 순간 우울한 푸름으로 변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몇 대의 버스를 그냥 보내고, 한참 동안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던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다들 살아가고 있으니, 나 또한 시간을 흘려보내듯 살아가보자고. 그렇게 한동안은 매일 카페에 앉아 작업에 몰입했다. 석사과정 동안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던 ‘고기를 주제로 한 시각 작업물’들을 고치고 확장해 나갔다. 인스타그램에서 작품들은 제법 반응을 얻었고, 새로운 작업을 만들어가며 내 감각에 대한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당장 이 작업들로 수익을 내거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하게 이어온 작업들은 최근에 쓰고 있는 글에 영감을 주고 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시기가 그의 예술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정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삶이 무너진 순간에도 그 시간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늙고 구부정한 노인이 가진 유일한 것. 기타. 기타를 놓지 않은 그림 속 노인처럼 말이다. 그리고 피카소는 청색시대를 지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딸이 유치원 학예회 무대에 처음 서게 되었을 때, 한 달여의 연습 기간 동안 아이는 하원 후 집에 오자마자 사소한 일들로 자주 화를 냈다. 새로운 물건이 왜 있는지, 가구가 왜 옮겨졌는지,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것들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전에도 아이가 비슷한 시기를 겪었던 것을 떠올리며, 유치원 선생님과 상담을 통해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결국 아이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체력 소모가 아니라, 준비 과정에서 틀리거나 잘 해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였던 듯했다. 학예회가 끝난 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곱씹어보면 딸은 아기 때부터 질문받는 것을 싫어했다. 틀린다는 것,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일이 더 많고, 해낼 수 있는 것보다 해내지 못하는 것들이 앞을 가로막는 순간이 찾아온다.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친구에게 거부당할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맞이하거나 원하던 목표를 내려놓고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문은 열려 있다. 삶은 우리가 걸어 나갈 수 있는 길을 끝내 남겨둔다. 청색시대를 지나 최선을 다해 여정을 통과하다 보면, 결국 장밋빛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피카소가 그랬듯, 우리는 다만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살다 보면 너도 분명 푸른 시기를 지나게 될 거라고.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어도 마음이 가라앉고, 애써 붙들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온다고. 그때의 너는 지금보다 더 예민하고, 더 조용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네가 삶을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그러니 푸른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미워하거나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고, 잠시 멈춰 서 있어도 괜찮다고. 청색시대는 언젠가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을 끝까지 지나온 사람에게만, 다음 색이 찾아온다. 피카소가 그랬듯, 우리도 결국은 시간을 건너가며 살아가는 존재이니까.
그러니 괜찮아 아가야.
이 또한, 지나간단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수도사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가라서 피카소가 되었어.
-피카소